조수희 부산의대 교수(양산부산대병원 혈액종양내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인간입니다. 이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2016년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마지막 대사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평생 목수로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심장병이 악화돼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삶을 비참하게 무너뜨린 것은 '병'이 아닌 복잡하고 허울뿐인 복지행정 절차였다.
이 비극이 더욱 아프게 느껴진 것은 현실 속 여러 다니엘 블레이크들의 얼굴이 떠올라서다.
'비호지킨림프종'이라는 희귀암을 앓는 국내 환자들은 정책의 사각지대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 연간 국내 비호지킨림프종 발생 환자 수는 약 2000명 정도로 추정되나 암 중 사망률이 9번째로 높다. 비호지킨림프종 중에서도 '미만성 거대 B 세포 림프종(Diffuse Large B Cell Lymphoma, 이하 DLBCL)' 환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호지킨림프종의 약 43% 정도이며, 매년 환자수가 증가하는 추세다. 대부분 60세 이상의 고령 환자다.
국내 DLBCL 환자들이 겪는 첫 번째 장벽은 우리나라에서 유독 제한적인 치료옵션이다. 급여가 인정되는 1차 치료제는 R-CHOP(리툭시맙·사이클로포스파마이드·염산 독소루비신·황산 빈크리스틴·프레드니솔론 병용요법) 단 한가지이며, 2차 치료부터는 급여 가능한 치료옵션이 아예 없다. R-CHOP과 같은 고용량 화학요법이 어려운 고령 환자나 재발 환자는 치료가 답답한 상황이다.
미국 NCCN((National Comprehensive Cancer Network) 가이드라인이 권고하는 R-CHOP 외 다른 치료법은 국내에서는 DLBCL에 대한 적응증 조차 없다. 이 중 일부 치료법은 사전신청요법 제도를 통해서만 사용 가능하다. 고전적인 치료가 어려운 환자들은 해외에서는 당연하게 쓰이는 치료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절차를 밟아야만 한다. 심지어 사전신청요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의료기관 자체가 제한돼 있고 승인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승인이 나더라도 대부분 인정 비급여로 약값 전액이 환자 본인 부담이다.
그나마 이러한 사전항암신청 절차를 어렵사리 거쳐 환자에게 약제 처방을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수많은 의뢰들이 '3상 시험 결과가 없다', '가이드라인에 권고 사항이 없다', '교과서에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 당하고 있다. 3상 시험이 이뤄지기 힘든 질병의 특수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절대원칙만을 고수하는 것이다. 문제는 거부 당한 치료법이 미국에서는 식품의약국에서 오래 전 승인을 했고, 이미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는데 있다.
규제는 질서 있는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규제가 본연의 의미를 상실하고 인간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우리나라 보건정책의 기본 틀인 허가제도 및 보험제도는 빠르게 변하는 글로벌 의료환경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좋은 약임을 누구나 알지만 쓸 수 없는 사회, 멀리 있는 아프리카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 정책은 사람보다 클 수 없다. 정책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수단이다. 특히 보건정책은 국민건강의 보호 및 증진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인 '보편건강보장'을 달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희귀한 암이라는 이유로 소외 당하고, 허가 하기에 임상데이터가 부족하다는 일률적인 잣대를 먼저 내세우기 보다,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절차이고 정책인지를 먼저 제고할 필요가 있다. 오늘도 효과 있는 치료법은 개발되고 있으며, 약의 존재를 알지만 환자에게 말 못하는 의사들이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세계의 수준에 맞는 치료권리를 누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