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세호 기자 seho3@doctorsnews.co.kr
  • 승인 2018.02.2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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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준
김호준

날카로이 벼린 무언가에 갈려져 고른 말이 되었지만
낱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쏟아지는 의서에 
그들이 운신할 자리는 없다
 
ㄱ, ㄴ, ㄷ……. 
 
종이를 넘어서자마자 뚝뚝 떨어지는 말 
쭈그려 앉아있는 그들 위로 세월의 무게가 추출되고
낮게 
더 낮게, 병실은
환자의 말을 받아내고 있다 
 
성긴 모공들마다 담배 내음이 밴 예순여덟 살 남자 환자
날숨을 타고서 흘러내리는 그의 말은 차갑다 
어려운 글자들로 가득한 하얀색 가운이 의자에 앉자
말들은 차트를 앞에 두고 제 자리를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연이은 사업 실패로 떠나보낸 아내의 그림자와 
지키지 못했던 아이들이 보내온 편지와 
늙은 어머니가 삭인 눈물
그들은 모두 걸러지고 말았다
 
밖에서 묻어온 그을음이 병실과 어울려 
누지게 익어가고 
안으로 연명해온 말들은 한 방울씩 떨어지는 링거액을 따라 
천천히 식어간다 
 
모두의 숨소리가 낮아지는 저녁
하얀 베게에는 아직 못 다한 말들이 맺히고 있다 

 

공중보건의사/2014년 <시와 사상>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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