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키가 180cm도 넘는 장신에 덩치도 좋은 아저씨가 자그마한 아주머니 팔에 기대어 다정한 모습으로 절뚝거리며 외래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두 달 전부터 짚고 다니시던 지팡이가 손에 들려 있었다. 넉 달 전에는 척추보조기 따위는 필요 없다고, 그냥 잘 걸어 다닐 수 있다고 외래를 나가셨던 분이었다.
전이성 폐암인 아저씨는 처음 만날 때보다 점점 더 힘이 떨어져간다. 반년전 처음 흉추에 암이 전이돼 보조기 처방을 위해 의뢰를 받아 처음 만났다.
보조기를 한 상태에서 누워만 있지 마시라고 잔뜩 힘을 주어 잔소리를 하고, '팔다리 힘이 약해지면 안된다, 매일 움직여야 한다'고 하면서 운동을 가르쳐드리고 보행치료를 해드렸다. 척수 손상이 진행돼서 다리에 힘이 빠졌는데도 지팡이를 짚고 씩씩하게 걸어 다니던 환자인데, 최근에 몇 차례 힘이 풀려 넘어진 후부터는 아예 걸으려 하지를 않는다는 부인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앉아만 계신다. 예전 같았으면 "지금이라도 일어서면 날라 다닐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을 텐데, 예전에는 한 운동 했다고 작은 목소리로 우물거리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만다.
죄인인 것이다. 환자는 무언가 잘못한 죄인이다. 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부끄럽고, 미안해하는, 그렇게 오늘도 을이어야 한다. 아무도 뭐라 한 적도, 눈치를 준 일도 없건만 고개를 들고 큰소리로 말하지 못한다.
그 앞에서 난 오늘도 한껏 힘을 주고, 세상을 아는 마냥 잘난 척하며 지난 주 학회 발표 준비를 하다 생각한 멋있는 말로 너스레를 떤다. 지나간 과거는 잊고 오늘 가진 힘으로 새롭게 하루를 설계해보자고…. 안전하게 붙잡고 걷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병을 앓는 일이 죄처럼 느껴지고 사람들 앞에서 마음이 을의 자세를 취한다."
작년 갑자기 간암 4기로 진단받고 난 이후 <아침의 피아노>라는 유고작 한 권을 남기고 떠난 철학자 김진영 선생이 암진단을 받고 남긴 메모였다.
암 환자는 어느 날 자신이 세상의 목적이며 주인인 자리에서 밀려나서 의미 없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세상의 보살핌을 받아야하고 도움을 구하는 자리로 내려오게 되어, 의료의 대상이 되고, 수단이 되고, 객체가 된다.
운동 안한다고, 자꾸 걸으라고 열심히 살라는 꾸지람만 잔뜩 늘어놓고는 어떻게 아픈지, 왜 몸을 움직이는 게 힘든지는 들으려하지 않는다.
마치 당연 한 듯 한층 허약해진, 비루해진 몸을 설명해 보지도 못했는데, 힘이 빠져가는 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겨우 앉을 수 있을 뿐인데, 앉아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왜 약한 사람은 늘 자신이 없고 일상에서 내쫓기고,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아가야 할까.
이 사회의 그늘진 모습은 그렇게 환자에게 다시 투영된다.
환자는 보호를 받아야 하고, 도움을 구걸해야 하는 을이 아니다. 수단이 아니고, 객체가 아니다. 그는 주체이며, 목적이고, 갑으로서 베푸는 자이다.
"누구에게나 몸속의 타자가 있다. 환자는 그 타자가 먼저 눈을 뜨고 깨어난 사람이다. 먼저 깨어난 그 눈으로 생 속의 더 많고 깊은 것을 보고 읽고 기록하는 것. 그것이 환자의 주체성이다"
김진영 선생이 스스로의 환자의 몸을 통해 깨달은 글귀이다.
그는 먼저 알았다. 주체가 객체와 하나가 되고, 목적이 수단과 합쳐지고, 갑이 을이 되는 세상에 대한 바람을. 그리고 떠났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늘 을의 자세를 갖게 되는 암환자들이 이 넓은 병원, 이 많은 의료진 중 한 명에게, 평생, 목적이자, 주체이자, 갑으로 살아온 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신나게 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를 내가 들을 수 있다면, 오늘도 의사로 여기에 살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순서대로 태어나서 순서 없이 이 세상을 떠난다.
의료란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행위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성공이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라는 일방통행의 길 위에 서 있다.
의료의 목적에 사람을 살리는 것 외에 삶의 질을 향상한다는 것이 추가되면서 혼란함 뒤로 모습을 숨기고 있지만, 여전히 병리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계몽주의적 사고는 우리의 준거점이다.
자연과학의 토대인 사실과 근거에서 인문과학과 철학의 세계인 가치의 개념으로 탈바꿈하려 하지만,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다.
아픈 증상을 낫게 만들고 누워있는 사람을 걷게 만들면 성공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점점 더 나빠지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
우린 두 다리를 갖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존재만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 사회의 기준에 최소한 맞추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걷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최선인 사회이다.
힘을 더 키워주어야 하고, 좀 더 잘 걷게 만들어줘야 한다는 정상을 향한 한 방향의 목표를 갖고 효율성을 따지는 치료가 전부일 뿐이다. 하물며 재활이 이러할 진데.
왜 유대의 왕이었던 그는 절대자로서 자신의 힘으로 모두를 보살피려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