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업 글로벌케어 북아프리카 본부장
소외된 이들이 흘리는 절망의 눈물이 소망의 웃음으로 바뀌는 날을 꿈꾸며 새 생명을 나누고자 분주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꿈이 있어 행복하다는 박세업 글로벌케어 북아프리카 본부장. 박세업 본부장은 현재 모로코와 모리타니아에서 결핵보건·모성보건·학교보건·저소득층 의료지원·영양보건 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외과의사로 의료행정가로 국제보건전문가로 쉼없이 달려온 그의 여정을 들여다본다.
"1988년 의대 졸업하고 응급실 인턴을 하던 시절엔 전국적으로 보험이 적용되던 때가 아니었죠. 결핵환자들이 매일 피를 토하고 응급실을 방문하는데도 입원비가 없어서 입원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난한 환자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박세업 본부장은 뜻이 맞는 동료와 자금을 만들어 입원할 수 있도록 도왔다. 누군가를 도왔던 그 첫 경험이 기회가 되어 일상 가운데 자연스럽게 봉사를 실천했다. 1998년 베트남 남딘성에서 수술을 진행한 것을 계기로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의료봉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국내외를 마다 않고 정기 봉사활동을 펼쳐오던 중,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개인 의원을 접은 뒤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한 그는 2005년 큐어 카불인터네셔날 NGO병원에서 외과과장으로 일했으며 2007년 바그람 미군부대 내 코이카 한국병원 병원장을 맡았다.
"현장에서 수술하면서 생명을 구하고 아프카니스탄 현지 의사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기초 의료 혜택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 하나로 2011년 50세라는 젊지 않은 나이에 미국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에서 국제보건석사를 마쳤다. 그 후 국제보건전문가로서 결핵, 영양부족 그리고 모성보건과 같이 개발도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예방, 치료 및 재활이라는 실현 가능하고 다양한 접근을 통해 의료현장을 지키고자 노력해왔다.
"개인 삶의 의미 있는 변화와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전인적인 변혁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의료활동은 구호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WHO 헌장은 '건강이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 외에 신체적 · 정신적 · 사회적으로 완전히 좋은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지요."
육신의 병과 내면의 고통을 치유하는 전인적인 접근을 선호하는 박세업 본부장은 이를 위해서는 현지인들의 삶 가운데로 들어가 그들의 언어와 문화, 삶의 방식을 배우는 것이 필수라고 말한다.
# 아프가니스탄 전쟁터에서 시작한 인생 2막
박세업 본부장은 의대 입학 후 아프리카에서 사랑을 실천했던 슈바이처의 삶을 떠올리며, 오지에서 대부분의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일반외과를 선택했다.
"처음엔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찾고 재정적인 도움을 주거나 정기적으로 시골과 해외로 봉사활동을 다녔습니다. 40세가 되면서, 남은 인생의 하프타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죠."
아프카니스탄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여인들과 아이들이 고통받으면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남은 하프타임을 도전으로 이끌었다. 수도 카불에서 좀 떨어진 미군기지내 코이카 한국병원에서의 생활은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끊임없는 헬기 소리, 고막이 터질 듯한 전투기의 이륙 소리, 작전을 끝내고 착륙 직전 남은 로켓을 쏘아 터뜨리는 폭음,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들까지…. 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코이카 한국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의 역할은 물론이고 지역개발을 위한 지역복구팀의 활동 및 대민진료 활동까지 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부대의 망루에 올라가서 철조망 밖으로 진료받기 위해 몰려온 많은 환자들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현실에, 현지 의료인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판단했다. 다른 병원들과 협력해 지역 내 의료인력에게 내시경, 초음파 그리고 필수적인 수술을 가르치는 인턴쉽과 훈련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때 훈련프로그램에 참석했던 의사들이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훌륭한 외과의사로, 내과의사로 남아 소식을 줄 때마다 매우 감격스럽습니다."
국제보건을 공부하면서 북아프리카에 결핵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국제보건의료 NGO로서 아프리카를 포함한 국내외 의료지원사업을 펼쳐오고 있는 글로벌케어와도 인연이 닿았다. 박세업 본부장은 지역중심의 일차보건의료(Community-based primary health care)라는 동일한 비전을 공유하며 북아프리카 본부장으로서 다양한 보건사업을 통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모로코와 모리타니아는 심한 빈부 격차와 절대 빈곤으로 도움이 절실한데, 프랑스권 국가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원조도 부족하고 실제 와서 돕는 의료인들도 적습니다. 감사하게도 타 문화나 새로운 언어에 두려움이 없었고, 자녀들도 성장해 이곳으로 오는 데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늘 약자들이 필요한 곳 한가운데 있었다. 구개열 환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베트남을 찾았고, 외과의가 필요하다고 해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 어린이들을 위한 영양공급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해 에티오피아를 찾았고, 결핵환자가 많다는 보고서를 읽고 기꺼이 모로코와 모리타니아에로 향했다. 의료라는 전문성을 가지지 않고는 접근하기 어려운 의료 소외 지역만을 찾아다닌 것이다.
# 더불어 함께 하는 기쁨이 있는 길
교장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의 가르침,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의 가르침에 더하여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이타심'은 삶의 원동력이었다. 특히 모교인 브니엘고등학교의 교훈 중 "웃는 자와 같이 웃고, 우는 자와 같이 우는 사람이 되련다"라는 말을 마음 속 깊이 새겼다.
"모로코에서 결핵퇴치프로그램에서 만나게 된 자카리야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똑똑하고 잘생겼지만 너무 가난해 공부를 할 수도 없었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벌이에 나섰지만 돌아오는 것은 낮은 임금과 무시였습니다. 결핵마저 걸려 일터에서 쫓겨났죠. 불평등과 부정의에 대한 분노로 타오르는 그의 눈을 보면서 약을 먹고 완치된다 하더라도 내면의 깊은 병이 치료되지 않는다면 생명을 잃을 것 같다는 불안함이 밀려왔습니다. 나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지요. 이제 자카리야는 우리 결핵사업에 스텝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모로코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사회봉사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물론 기대했던 결과물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거나, 내가 해야 할 이유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도 있다. 이제 그 정도 하면 됐다고 가족도 생각하고 노후도 생각하라는 가까운 이들의 관심있는 조언을 접할 때 흔들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가장 위로와 위안이 되는 것은 함께 하는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자 하는 같은 마음으로 지금까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전적으로 믿어준 아내와, 환경이 다른 곳으로 자주 옮기면서도 학업을 잘 마치고 모로코에 와서 우리가 걸어온 길에 동참해준 아들들이 큰 힘이 됩니다."
박세업 본부장은 그의 일이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혼자서 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현지인들을 포함해 많은 분들과 함께 하는 일이기에 기쁨이 있으면 배가 되고, 힘듦이 있을 때는 위로와 격려가 있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이 길이 외롭고 힘든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기쁨이 있는 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 내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국제사회에서 한국 의료인들은 여러 분야를 선도해가고 있습니다. 유일무이하게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바뀌면서 최근 공적개발원조자금도 증가하고 있고 다양한 의료 활동으로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은 현장에서의 경험의 기록을 담은 연구가 더 필요하기에, 연구자로서 현장에 남고 싶습니다."
박세업 본부장은 병원은 물론 아직 제대로 된 의대 졸업생조차 없어 기초적인 의료 지원이 절실한 모리타니에서 진행중인 결핵퇴치사업과 영양지원사업, 다양하고 적극적인 의과대학 내 트레이닝 프로그램 등의 사업이 좋은 결실을 볼 수 있기를 희망했다. 북서아프리카에서 지역 의료전문가로서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싶다며 외부인이 아닌 내부자의 관점으로 현지 환자와 현지 의료인들의 필요를 발견해 협력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1963년 8월 28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마틴 루터 킹은 '내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을 합니다. 어린 네 명의 자녀들이 피부 색깔로 판단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격과 능력으로 평가받는 그날이 오리라는 꿈이 있다"고 설명했지요. 단지 대통령이 돼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꿈이 언제 이뤄질지 모르지만 그 길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미로 느껴졌습니다. 이 연설문은 내가 알고 있었던 꿈의 정의를 바꿔놓았습니다. 내 꿈은 당장 결과를 볼 수 없더라도, 내가 속한 공동체가 소망하는 것을 같이 바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던 소년은 외과의사가 됐고 느지막이 보건학을 공부해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에게 꿈에 대한 이런 정의가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겪었던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이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목표를 정하고 이루기 위해 달려가 성취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었기에, 그의 꿈은 변하지도 않고 바래지도 않았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졌다. 50대 후반이 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