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 소통 위해, 대체 불가라면 사전에 등재시켜야
1990년대 중반까지 신문사 수습기자로 입사하면 맨 처음 하는 일이 새벽부터 경찰서를 취재하는 것이었다. 경찰서 형사계에서 조사한 사건 조서를 읽고 기사화 여부를 판단한 뒤 바로 위 선배('1진'이라고 불렀다)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조서에서 처음 접한 '시건장치'
수습기자 첫 날 접했던 조서는 단순 절도 사건이었다. 한데 조서에서 이해 못 할 단어가 튀어 나왔다. '시건장치'.
지금이라면 스마트폰으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하겠지만, 당시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기자가 X 팔리게 형님들(기자들은 경찰서 형사를 '형님'으로 불렀다)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문맥으로 보니 자물쇠를 말하는 것이었다.
맞았다. 한자로 '施鍵裝置'로 쓰는데, 자물쇠 장치를 말했다. 건 자가 '자물쇠'를 뜻하니까...
그 뒤 나 역시 다른 일반인과 대화할 때 자물쇠를 '시건장치'라고 불렀다. 그럼 "시건장치가 뭐냐?"는 질문이 거의 100%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으쓱대며 "아, 자물쇠 장치"라고 답했다.
'니들이 법조계나 경찰에서 쓰는 전문용어를 어찌 알겠어...'
하지만 시건장치라는 단어의 운명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한문 투의 행정 용어를 정비하면서 시건장치는 '잠금장치'로 바뀌었으니까.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술기'와 '기전'
말은 결국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 시건장치라는 단어를 쓰며 우쭐했던 20대 중반 청년은 어느덧 50대 후반을 바라보면서 "뜻이 왜곡되지 않는 한, 전문용어일지라도 쉬운 말로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됐다.
어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느 병원 광고를 듣게 됐다.
"올바른 치료, 올바른 술기, 000 병원"
'술기'라는 말이 이날따라 죽창처럼 귀에 꽂혔다. 하긴 팔자에도 없이 의협과 관계를 맺으면서 의사들로부터 자주 듣던 단어였다.
한데 의사들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맥락을 보면 기술 혹은 솜씨를 뜻하는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 혹은 그 학파가 썼다는 'Life is short, Art long'이라고 할 때의 'art'임은 분명했다. 'art'를 '기술'로 번역하든 '솜씨'로 번역하든 '의사의 손 재능'으로 번역하든 문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우리 어문정책을 책임지는 정부기관인 국립국어원에서 공식 발간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술기'라는 단어는 이 하나만 등재돼 있다. 술기(술氣). 명사. 술에 취한 기운.
모든 전문용어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될 수 없다는 것은 잘 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환자에게도 쓰고 심지어 의료 광고에도 등장하는 단어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말은 결국 소통하기 위해 존재한다. 의사들끼리는 몰라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진료나 광고에서, 정부가 공식 인정하는 '표준 사전'에도 없는 말을 쓴다는 것은 '소통 의지가 없음'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기전'(機轉)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역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오르지 않았다.
이 단어가 'mechanism'의 번역어인지, 'acting mechanism'의 번역어인지 필자는 의학에 무식해서 잘 모른다. 하여튼, 기본적으로 기계를 뜻하는 말인 '機'와 구른다(변한다)는 의미의 '轉'을 썼는데, 한자어만으로 의미를 가늠하는 것은 필자에게는 불가능하다. 아예, 영어로 '(acting) mechanism'으로 쓴다면 짐작이라도 할 터인데... 십중팔구, 일본 번역어를 그대로 따라 쓴 것으로 보인다. '술기'가 그렇듯이.
평소 존경하는 홍성진 서울시의사회 부회장님과, 외우 황규석 서울시 강남구의사회장에게 여쭤보니 기전을 '작용 원리' '병태생리(pathophysiology)의 흐름' 혹은 '(병리 현상에서) 연속적 변화의 연계 또는 변화 과정' 정도로 이해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인 의사들
말의 유통 방식에도 신경 써야
필자는 전문용어는 전문용어로써의 속성 때문에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때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쉬운 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본래의 깊은 의미가 상실되고 단순화될 위험성'도 있다고 본다. 인정하기 싫더라도, 우리의 근대가 애초 일본으로부터 건너 왔기에 일본산(産) 번역어를 쓰지 않을 수도 없다고 본다.
그렇더라도 '기전' 같은 단어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유통되는 것은 아쉽기만 하다.
우선 한자어로 써도 뜻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아예, 컴퓨터처럼 그냥 원어를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럼 짐작이라도 된다. 그럼에도 기전이 오랫동안 의료계에서 사용해왔기에 바꿀 수가 없다면,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시키려는 노력을 했어야 옳다. '전문용어이니까 일반인이 알아듣든 말든, 혹은 우리 어문 정책을 책임지는 기관이 발간하는 사전에 오르든 말든 상관없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칫 전문가의 오만으로 비칠 수 있다.
찾아보면 이런 단어나 표현들이 꽤 있을 것이다. 의사와 국민 간 소통의 첫걸음은 '말의 상호 이해'에서 출발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이신 의사 선생님들이 '말의 유통 방식'에 조금 더 신경 써 주시기를 어느 빙충이가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