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피해자화(victimization)로 인한 '무기력·공황상태' 유발
"청소년 보호시스템 열악…구조 개선 없인 제2 피해 계속될 것"
'텔레그램 n번방' 성범죄 사건이 전국민적인 '분노'를 낳고 있는 가운데, 피해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재활과 함께 청소년 보호 시스템 등 근본적 해결책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왔다.
'n번방' 사건은 익명성 채팅방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협박해 만든 가학적 성 착취 영상·사진 등을 공유,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경찰이 파악한 피해자는 현재까지 74명. 이 중엔 미성년자 16명도 포함됐다.
해당 사건과 관련,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국민청원에는 256만 명(24일 기준) 이상이 참여, 역대 최대 청원 동의를 기록했다. 유사한 청원으로 올라온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공개를 원합니다(184만명) ▲가해자 n번방박사,n번방회원 모두 처벌해주세요(53만명) ▲N번방 대화 참여자들도 명단을 공개하고 처벌해주십시오(40만명) ▲텔레그램 아동.청소년 성노예 사건 철저한 수사 및 처벌 촉구합니다!!(32만명) 등도 공식 답변 기준을 넘었다.
청원인은 "타인의 수치심과 어린 학생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가해자를 포토라인에 세워달라. 절대로 모자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직접 해당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 SBS 뉴스는 23일 아동과 청소년들을 협박해 가학적인 성 착취 영상을 만들어 유포한 '박사방' 핵심 운영자 조주빈(남·25세) 신상을 공개했다.
'n번방' 사건 가해자들은 모델·데이트 아르바이트 등을 미끼로 피해자들의 신상을 알아낸 것으로 드러났다. 초기에는 낮은 수위의 사진을 요구하다가 알아낸 신상을 토대로 유포하겠다고 협박, 점점 더 높은 수위의 성 착취물 영상·사진을 촬영했다.
'n번방'은 텔레그램 익명 대화방을 뜻한다. 대화방을 1번, 2번, 3번방 등 번호를 붙여 개설해 n번방이라 불린다. 가해자들은 피해 여성들을 '노예'로 부르며 협박을 통해 얻은 성 착취 영상 등을 이용, 'n번방' 참가비 명목으로 수익을 챙겼다.
피해자들은 왜 이런 협박에 응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상훈 대한신경정신의학과의사회장은 [의협신문]과의 통화에서 "victimization, 즉 피해자화에 의한 것"이라며 "지속적인 언어·신체적 폭력에 노출되면, 정신적 외상이 이뤄지고 이 역시 지속되면 공황 상태가 된다. 이때, 피해자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워지고, 자살·자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상훈 회장은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마치 본인을 죄인처럼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도망가라고 놔둬도 도망가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를 수 있다"며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연락이 올까 봐 전전긍긍하는 상태로 24시간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는 하루 종일 직·간접적으로 폭력에 노출되는 환경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전문가와의 상담과 입원 치료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상훈 회장은 "심신이 약해지게 된, 피해자화된 상태에서는 판단력이 흐려진다. 피해자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알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알려질 수 있다는 공포에서 기인한 상태"라며 "이런 상태에서 스스로 빠져나오기는 상당히 힘들다.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진단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외부와 일단 차단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여 입원 치료를 권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면 제2, 제3의 'n번째' 피해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의진 연세의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가해자에 대한 엄벌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해, 유사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에도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짚었다.
신의진 교수는 "해당 사건 자체 역시 극악무도하며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보호 환경이 없는 미성년자들이다. 자기보호가 힘든 상황에 있는 아이들이 SNS나 앱을 통해 성폭행 등 범죄의 타깃이 되기 쉽다"고 지적했다.
n번방 사건 외에도 생각보다 많은 청소년이 채팅 앱을 통한 '조건만남' 등을 하면서 협박과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신의진 교수는 "너무도 안타까운 점은 자기 보호에 취약한 상황에 있는 아이들에 대해, 사회에서 보호할 수 있는 안전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청소년들을 범죄 타깃으로 내몬 것은 결국 사회의 미진한 시스템에서 기인한다"며 "추가 피해자 양산을 막기 위해서는 사회적 보호 시스템이 개선돼야 한다. 근원적 문제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라고 강조했다.
피해자들의 치료과 재활에 대해서도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신의진 교수는 "n번방 사건에서 정말 걱정되는 측면이 바로 피해자들의 회복 문제다. 적어도 피해자의 3분의 1은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해 보인다"며 "유사한 사례를 통해 비춰볼 때, 피해자들은 '초기에 왜 자기방어를 못 했을까' 등의 자책을 이어간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서 자해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또한 협박에 의해 창피한 것을 무릅쓰고 행하는 과정에서 해리현상 등의 정신병리가 생각보다 깊게 생겼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단편적으로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하기보다는, 케이스별로 정밀한 상담과 치료가 필요하다고도 덧붙였다.
신의진 교수는 "예를 들어 만약 가족 보호가 이뤄지지 않았던 경우라면, 가족과의 관계회복 등을 위한 가족 상담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가정에서 피해 사실을 몰랐던 경우, 가족 상담을 통해 상당히 좋아진 경우가 있다"며 "사건에 대해 단죄도 중요하지만, 추적관찰과 치료·재활 부분에도 큰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