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의료계, 새로운 의학적 진실 보여줄 수 있는 역량 충분
의학자 사고 전환...정부, 전통적 관념 뛰어넘는 전폭적 지원 필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는 지구를 천구의 중심으로 여겼다. 주전원과 부전원 등 오컴이 면도날로 잘라내지 못한 쓸데없는 다수를 가정해서 어마어마하게 복잡해졌지만 나름대로 행성 운동을 이해하거나 항해와 같은 실생활에 적용됐다. 난해할수록 깊이 있다는 허위의식으로 권위는 높아졌고, 기독교적 세계관은 천동설에 대한 반박을 허용하지 않았다.
서기 1600년, 7년간의 고문과 회유에도 과학적 신념을 지킨 52세 부르노(Giordano Burno)는 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 세워졌다. 33년이 지난 후, 70세 갈릴레오조차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 사실로 미루어 당시 화형식을 구경한 군중은 동정은커녕 지지와 환호를 보냈으리라.
과학은 천재성뿐 아니라 신념과 희생 그리고 대중의 지지를 통해 발전한다.
베이컨은 "과학은 자유이며 과학의 진보는 절대적으로 선이다"고 하였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대해 쿤(Thomas Samuel Kuhn)은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한 시대의 인간사고를 지배하는 인식체계, 즉 패러다임은 논리적, 합리적 방식이 아니라 다수의 지지에 의해 결정된다. 과학혁명도 객관적 증거와 논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집단을 설득하여 다수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신념의 선입관이 있는 한 과학은 자유나 가치중립적일 수 없으며 진실에서 멀어진다.
1988년 Kerr White는 <의학, 과학인가 문화인가>에서 의학은 20∼25%만 과학적 근거에 의한다고 추측했다. 1992년 기얏(Gordon Guyatt) 등의 '근거중심의학'은 임상의학의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이다. 근거중심의학은 무작위 대조실험, 과거 논문들의 체계적 고찰, 메타분석을 통한 '객관성'과 '일반화'를 특성으로 한다.
하지만 '객관성'은 연구 결과에 대한 동료 학자들의 신뢰를 의미하므로 연구자에 대한 선입견과 권위가 개입된다. 대조군은 무작위로 추출하지만 인과적 추론 과정에는 연구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제약회사 등 이해집단이 관계되면 연구범위가 한정되고 결과는 편향되기 쉽다.
'일반화'에서 증례 보고는 증거 수준이 낮고 대규모 무작위 연구만이 근거가 된다는 기준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개별 특이성들을 포괄하지 못하고 임상의 맞춤진료에 한계를 노정한다.
고혈압 환자 치료에 있어 혈압을 엄격히 낮출수록 좋다는 연구와 그럴수록 오히려 사망률이 높아진다는 상이한 결과가 번갈아 보고되는 사례는 근거중심의학의 결과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신뢰를 유보해야 함을 시사한다.
신종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중국은 사람 간의 감염은 없다는 입장이었으므로 환자가 급격히 늘어난 무렵 뉴스에서는 사람간의 전파가 확인되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위협이 높아가자 한국 정부의 자문기구에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들은 기존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축적된, 당시에는 가장 과학적 증거인 '유증상자에 의한 밀접접촉 감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신종 코로나는 글자 그대로 '새로 생긴' 질병이므로 새로운 특성을 가진다는 단순명료한 사실은 경시됐다.
한편, 소위 전문가들이 수많은 언론에 참여했다. 그들은 매우 단편적이어서 단지 참고사항일 뿐인 최신 논문을 먼저 인용하면 선구자나 대가가 된 듯 행세했다. 극히 소수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불완전한 paper에 나온 발열 등 증상의 진단적 가치·전염력·전파 경로 등에 대한 제각각의 소견이 전체인양 유튜브까지 동원하면서 혼란을 가중했다.
코로나19는 이제야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뿐인데 마치 대통령선거에서 불과 한두 개의 투표함만 열어보고 당선을 확정 짓는 양상이다.
코로나19 초기 대부분의 국가는 중국에 이어 한국과 아시아에 대한 냉소적 태도와 상대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낙관적 전망과 안이한 대응을 선택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반전됐다. 피할 수 있었던-지나고 나면 늘 그렇듯이-몇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중국에 대한 선입견이다. 대유행은 독재 국가의 은폐와 열악한 문화와 환경, 부족한 의료자원, 낮은 시민의식이 주요 원인으로 당연한 결과라는 분석이 코로나19 자체의 특성을 간과했다.
둘째는 집단사고의 부작용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흔히 여럿이 모여 의견을 나누면 효과적이고 창의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수가 모이면 지식이 많거나 권위가 높은 사람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기 쉬워서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진주만 사건·피그만 침공·월남전·챌린저호 폭발사건은 집단사고의 위험한 결과이다.
중앙방역대책본부 등 정부가 만들어 놓은 규정과 지침이 강요하는 권위와, 바이러스 질환에 대한 권위자의 판단에 반하는 의견을 주창(主唱)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과학의 근본적 한계, 즉 귀납적 경험론의 불확실성이다.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는 논리적으로 자명하거나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명제만 의미가 있다는 태도를 비판한다.
모든 것을 정확하게 검증하기는 불가능하다. 러셀(Bertrand Russell)은 "닭의 입장에서는 매일 아침 모이를 주는 주인의 손은 착하다는 명제는 목을 비틀기 전까지만 귀납적으로 옳다"고 했다.
싯다르타 무케르지는 <의학의 법칙들:생명의 최전선, 가장 인간적인 과학의 현장에서>를 통해 "강력한 직관은 근거가 미약한 검사보다 낫고, 정상적인 것보다 예외적인 경우가 더 유용할 수 있으며, 완벽한 실험조차 완벽한 편향이 개입된다"고 충고했다.
서구가 주도하는 근거중심의학은 대부분 거대한 다국적 제약회사의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우리는 흉내 내고 따라가기 바쁘다.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창발성은 축적된 경험을 뛰어넘는 합리적 가설을 통해 나타나고 새로운 지식을 탄생시킨다.
국내 모 기업은 AI를 이용한 독창적 연구개발로 COVID-19 진단키트를 만들었고,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일본의 핵심소재 수출규제는 우리 기업의 독자 기술 구현으로 극복하고 있다.
의료계도 서구의 의학적 기준을 추종하지만 않고 적어도 몇몇 분야에서는 새로운 의학적 진실을 보여줄 역량이 충분하다. 다만 의학자의 사고 전환과 함께 국가에서 전통적인 관념을 뛰어넘는 전폭적 지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