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사시인회 지음/현대시학 펴냄/1만원
온통 블루다.
하늘과 바다는 늘 그런데다 시간은 이미 슬프게 무르익은 여름 한 가운데다.
게다가 2월부터 이어지는 코로나19는 삶을 헤집어놓은 채 평온한 일상을 기약없이 뒤로 물렸다.
슬픔·우울·절망·이별·고독 뿐이다.
마음도 블루다.
한국의사시인회의 여덟 번째 사화집 <코로나19 블루>가 출간됐다.
이번 시집에는 열 여덟 시인이 "코로나19로 인한 지루한 일상과 고통에 자그마한 위안이 됐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쉰 네 편의 시작(詩作)을 모았다.
어쩌면 마음속으론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구의 주인된 미생물에게 점령당한 인간들의 군상이 낱낱이 드러난다. 다행히 인간은 근신하며, 겸손하며, 경건하고, 엄숙하게 더불어 함께 사는 길을 찾고 있다.
김 완 의사시인회장은 시집 들머리에서 "감염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궁극적으로 '더불어 사는 삶'의 깊이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며 "감염병을 이해하는 데는 인문학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열 여덟 시인들도 시에 대한 마음을 옮겼다.
"시작은 지난한 고행이지만 한편으로 선한 즐거움을 준다. 이번엔 하나의 단순한 주제를 갖고 표현기법을 혁신적으로 해보려고 노력했다."(김경수)
"인생도 그렇고 사랑도 그리했는데 이제 시도 또 그렇게 다가와……젊음은 알 수가 없고 늙음은 할 수가 없으니 눈 질끈 감을 수밖에."(김기준)
"깊은 숲 그늘속에서도 잎사귀들 좁은 틈 사이로 바람이 지나갈 때는 산란하는 빛 알갱이들이 그늘의 기공, 숨구멍 속에서 빠져나와 희미한 아우라를 보여준다."(김세영)
"이제 끝인가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그님. 어차피 한 세상 같이 가야 될 팔자인가 보다. 모른 채 해보지만, 기어이 세상에 울음소리를 내게 한다."(김승기)
"모든 사람이 결국은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윤달의 수의처럼 장롱 속에 꽁꽁 묻어둔다.…죽음의 왕관이 빨리 물러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김연종)
"코로나19로 변한 세상 풍경이 낯설다. 의사도 환자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됐다. "요즘 밥값을 벌었다는 말은 나라를 구한 것과 같다"는 어느 친구의 말에 울컥 눈물이 난다."(김완)
"글을 많이 썼지만 시를 쓰지 못했다.……기후와 날씨라는 것이 사람 마음처럼 되지 않음을 인정하는 오늘의 무기력함 때문에 나는 시라는 형식 앞에 앉아 오랜만에 집중할 수 있었다."(김호준)
"큰 그림보다는 작고, 작은 그림보다는 큰, 작고 사소한 것들,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그늘이 다가온다. 밀쳐 보지만 또 내 앞에 서서 밀린 숙제처럼 수취인 불명의 영수증만 재촉한다."(박권수)
"미생물이 지구를 뒤덮은 주인이 맞다. 우리도 근신하고 이들과 같이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어지러운 날에도 햇볕은 내리쬐고 바람은 불고, 제비꽃은 핀다는 것이 감사한 날이다."(서홍관)
"비 그친 강가인가, 바람부는 언덕인가 달빛 아래에선 이슬을 노래하고 별을 세며 슬퍼도 울지 않는 오직 그리움을 위해 그렇게 피고 지는 너는, 그저 꽃일 뿐이네."(서화)
"기둥이 있는 것은 쓰러진다. 궁전의 기둥도 신전의 기둥도 쓰러진다. 믿음과 신념의 기둥도 쓰러진다. 쓰러지는 운명의 그림자들! 이 봄에 퇴행성관절염과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다."(송세헌)
"마음먹고 독한 연단을 위해 대장간에 불쑥 들어선다. 달구고 두들기며 배어나는 신음을 비문 가득한 주문으로 노래하려."(유담)
"몇 편의 시로 우리 마음을 건져낼 수는 없겠지만 고흐가 그렸던 태양 아래 노랗게 익어가던 밀밭처럼 두 팔을 벌리고 봄 햇살 속에 누워 몸과 마음 이곳저곳에서 푸릇푸릇 희망이 싹을 틔울 때까지 기다려보고 싶어진다."(정의홍)
"성경 로마서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이성부의 시 '봄'의 시구로 시인의 말을 대신한다.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을 잊어버렸을 때도 너는 온다'."(조광현)
"아득하다. 간신히 실눈을 뜨고 쳐다보았지만 모르겠다.……그렇게 아득하다는 것은 '아득하다'란 말처럼 추상적이지만 그래도 어림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멀고 멀었다는 것, 그것이 뼈아프다."(주영만)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추스르고 자신과 가족과 환자를 지켜야 할 본분을 되새긴다. 별개의 개인이 모두 별이었으면…봄은 왔으나 봄이 이르지 아니함이 다만 슬프다."(최예환)
"봄은 다시 오지. 갔던 봄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 새로운 봄이 오지. 아무것도 반복하지 않아. 새로운 것뿐이야. 그래서 봄이지."(한현수)
"시를 통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가끔 시를 쓴다. 시가 내 옆에 있어주는 느낌이 좋아서, 큰 기대 없이, 큰 실망도 없이."(홍지헌)
<코로나19 블루>에 담긴 시인과 시다.
▲김경수(외로운 문장/이야기와 놀다/파란 드레스의 여인) ▲김기준(어떤 눈물/실벚나무/퇴행성치매) ▲김세영(그늘의 빛/끈/춘인·春印) ▲김승기(진료실에서 길을 잃다/북극성을 걷다/아이야 아이야) ▲김연종(생의 연약지반에 물방울이 맺혀있다/동거/내비게이션) ▲김완(영주의 밤/어떤 병원의 절차/언 땅이 풀릴 때) ▲김호준(응급실3/응급실4/응급실5) ▲박권수(못/아궁이/무말랭이) ▲서홍관(밤바다 사진/겨울 찬비/신장 팝니다) ▲서화(노이즈/심근경색/달 변주곡) ▲송세헌(산행일지/개산대제·開山大祭/고드름) ▲유담(눈가에서 사랑을 보내네/하루의 눈길/안경다리) ▲정의홍(돌로미테/송정바다에서/안경) ▲조광현(코로나19 블루/다시 일어선 여인에게/이반 일리치의 임종) ▲주영만(여여하다/그네와 아이/열대야) ▲최예환(2m/금감·金柑/일탈) ▲한현수(우연히 두 손이 작은 물결을 일으킬 때/벚꽃/문병) ▲홍지헌(밥 한 번 같이 먹자/여행/개화산 무궁화).
한국의사시인회는 지금까지 <닥터K> <환자가 경전이다> <카우치에서 길을 묻다> <가라앉지 못한 말들> <그리운 처방전> <왜 우리는 눈물이 나는 걸까?> <달이란 말이 찻잔 위에 올라왔다> 등 사화집을 펴냈다(☎ 02-701-2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