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찬 시인·수필가(서울 신동아의원장)
지구촌이 코로나 사태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여름 한낮 소귓골로 향했다. 팔백년 노거수 방학동 은행나무를 돌아 연산군묘에 이르니 도래솔들도 한줄기 바람을 기다리는지 잎이 쳐져 있다. 바람이라곤 한 점도 없는데도 인근 비탈에서 은회색 잎들이 쉴 새 없이 팔랑거린다. 잔가지를 촘촘히 뻗은 사시나무다. 나뭇잎들이 떠니 시원한 바람을 기대하며 걷지만 끝내 바람 소식이 없다. 사시나무는 그냥 서 있으면 될 것을, 왜 저리 떨고 있을까?
동북아시아 추운 곳이 고향이어서인지 늘 떨고 있는 사시나무는, 우리문화에 무척 많이 녹아 있다. 민요 나무타령에서도 "덜덜 떨어 사시나무, 바람 솔솔 소나무, 십리 절반 오리나무, 그렇다 치자 치자나무…."라며 사시나무가 맨 첫머리에 나온다. 춘향전 합방 대목에도 '문고리도 질세라 섣달 추위에 달랑달랑 사시나무 떨 듯 몸부림을 쳤고, 등잔불도 이불 귀퉁이가 들썩일 때마다 까무러쳤다간 다시 일어났다'는 대목이 있다.
불세출의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도 자신의 기구하고 애절한 심사를 사시나무에 부는 쓸쓸한 바람에 비유했다. 시인은 15살에 한 살 위인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다. 시어머니는 엄격했고, 남편은 과거공부를 핑계로 밖으로 돌았다. 18살 때 부친이 상주에서 객사하고, 19살 때는 어린 딸이 죽었고, 이어 20살 때에는 아들 희윤(喜胤)이 세상을 떠났다.
哭子곡자(아들 딸 여의고서)
去年喪愛女 今年喪愛子(거년상애녀 금년상애자)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哀哀廣陵土 雙墳相對起(애애광능토 쌍분상대기)
서럽고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蕭蕭白楊風 鬼火明松楸(소소백양풍 귀화명송추)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은 무덤에 어리비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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浪吟黃臺詞 血泣悲呑聲(랑음황대사 혈읍비탄성)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이 시를 읽는 내 마음도 무척 시리다. 겁을 크게 먹어 치아가 서로 부딪칠 만큼 턱을 덜덜 떨 때 우리는 흔히 '사시나무 떨듯 한다'고 한다. 하고 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왜 사시나무에 비유할까?
한자로 백양(白楊)으로 표시하는 사시나무 종류는 가늘고 긴 잎자루 끝에 큰 숟가락만 한 잎들이 가득 매달려 있다. 사시나무는 가늘고 탄력 있는 잎자루에 비해 잎이 크다. 잎의 앞면은 반짝거리는 녹색이고 뒷면은 은회색이니 작은 움직임도 눈에 띄게 반짝거린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의 느끼지 못하는 미풍에도 나뭇잎은 언제나 파르르 떨기에 팔랑버들, 파드득나무라고도 한다. 그러면 사시나무는 왜 이렇게 떨어야 할까? 사시나무는 생장이 빨라 많은 양의 물을 빨아올리는데, 빨아올린 토양수를 공기 중에 빨리 방사하기 위해서 이파리를 늘 떨고 있다한다.
영국 사람들도 생각하는 바가 같은지, 영어로 사시나무를 '트램블 트리(tremble tree, aspen)'라고 하며, 우리와 같이 떠는 나무의 뜻이다. 일본 사람들은 한술 더 떠서 '산명(山鳴)나무', 즉 '산이 울리는 나무'라고 부른다. 중국 사람들은 산양(山楊)이라 하는데, 이름에 떤다는 뜻은 넣지 않았지만 일반 백성들에게 묘지 주변의 둘레나무로 사시나무를 심었다. 잡귀가 올까 묘소를 깨어서 지키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한다.
사시나무는 모양새가 비슷한 황철나무를 포함하여 여러 버드나무 종류와 함께 버드나무과(科)를 이룬다. 한자 이름이 '양(楊)'이며, 껍질이 하얗다고 하여 '백양(白楊)'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부여의 궁남지(宮南池)를 축조할 때 사방 언덕에 양류(楊柳)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지가 위로 향하는 것은 '양(楊)', 밑으로 처지는 것은 '류(柳)'라 하여 구분했으니 사시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뜻이다.
사시나무란 말은 원래 사사나무였다. 최세진의 <사성통해>(1517년)에 의하면 자작나무를 한자로 사(桫)로 표시하였다. 예부터 무당이 굿할 때 자작나무나 그 사촌인 사시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썼다. 굿을 하면서 무당에게 신이 내리면 몸을 떨었는데, 이때 손에 잡은 신목도 떨리면서 나뭇잎이 내는 소리가 사사거리는 점도 서로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 백양나무 잎이 떠는 소리를 양향(陽響)이라 했고, 의성어로 소소(簫簫)라고 했는데 여기서 왔다는 설도 있다.
사시나무 속을 학명으로 Populus라 하는데, 영어로 popular하니 한글로 포플러라 한다. 이러하니 포플러는 속명(屬名)이지 특정 수종명이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가로수로 많이 심는 나무는 양버들이다. 백양나무에는 사시나무, 은사시나무, 은백양나무가 있다. 흔히 보이는 포플러 가로수는 백양나무가 아니고 서양 흑양나무 교배종이다.
개화기부터 선교사들이 헐벗은 산에 조림하려 은백양과 흑양인 가로수 양버들을 많이 들여왔다고 한다. 사시나무 목재는 끈끈한 수액이 없고 역겨운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에 나무젓가락, 성냥개비, 이쑤시개 등을 만들고, 흔한 데다 가볍기 때문에 낫자루, 호미 자루 등 농기구를 만든다.
곧게 자란 사시나무의 군락은 무척 아름답다. 특히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은 메마른 마음을 순식간에 흔들어놓을 만큼 매혹적이다. 사시나무가 떨고 있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불안해서가 아니고 각성(覺醒, arousal)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은 긴장과 각성을 피하고 항상 편안함을 추구한다할 수도 있지만,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정말 긴장과 각성을 싫어하기만 할까? 언제나 불편함을 줄이고, 안정되고 편안한 상태만 추구하려고 할까?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고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을 보면, 인간은 긴장과 각성을 즐기려는 경향도 충분히 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반드시 편안함과 안정감, 이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적절한 각성상태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의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과 그로 인한 각성이 필요하다. '심심해 죽겠다'는 표현은 농담이 아니고 진담이다. 자식들이 연로한 부모님께 "아무 일도 하지 마시고 집에서 편히 쉬세요"라고 하는데, 어찌 보면 매우 위험한 말이다.
팔랑거리고 있는 사시나무를 볼 때, 불안하거나 무서운 마음으로 보는 이들은 떨고 있다고 본다. 행복한 마음으로 본다면 흥겨워 보인다. 사시나무는 사람들이 감지할 수 없는 미풍에도 몸을 흔들면서 시련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한다. 사시나무의 흔들리는 몸짓은 결코 연약한 것이 아니라 생존법칙에 따라 각성하고 있는 중이다.
요즘 의료계, 특히 젊어서 정의로운 전공의와 의과대학생들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느라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 정부는 COVID-19와 사투를 벌리는 의료계를 소위 '4대 의료악법'으로 기습했다. 복지부장관은 의료계와 충분히 상의했다고 하지만, 실은 의사들의 고용주인 병원협회장과만 상의했다.
몇 달 전에는 효과가 인정된 항암제이지만 비싸다고 보험 적용이 안 되니, 전공의들의 성금으로 이 약을 사서 환자를 살린 예도 있다. 그런데 효과도 입증 안 된 한방첩약을 단지 오래 사용했다고 보험을 적용한다고 한다. 정작 떨어야 할 사람은 젊은 의학도들이 아니라 법과 절차를 어긴 집권자들이어야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