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면허관리기구 설립 위한 20년
다나의원·C형 간염 사건 계기로 의사면허·전문직업성 중요성 인식
외부 규제 아닌 독립성·전문성 갖춘 비정부기구 설립해야…자율규제 필요
우리나라에서 의사 면허관리기구 설립에 대한 담론은 21세기 초 대한의사협회에서 먼저 제기했다.
2001년 전 세계적으로 자유무역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세계무역기구(WTO) 도하 개발 아젠다(DDA) 협상은 모든 나라의 관심사였다.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서비스와 상품에 대한 자유교역을 추진하기 위해 나라 간의 각종 규제와 장벽을 허물고, 지구촌의 경제적 발전과 풍요로운 삶을 위한 자유무역 추진이 당시의 새로운 시대상으로 간주됐다.
서비스 산업의 국경을 철폐하자는 주장에는 보건의료서비스도 포함됐다. 서비스 산업에 더하여 전문직의 자유 이동도 협상의 주요 주제로 등장했다.
우리나라도 WTO DDA 협상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의협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나라 의사들은 선진국에 진출하고 싶어했고, 협상을 통해 별도의 시험없이 면허를 취득하길 원했으나 최종 협상에서는 제외됐다.
당시에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의협 회원들은 해외 진출에는 동의했지만 외국인 의사나 외국의 의료자본이 우리나라에 진출하는 것에는 부정적으로 답했다.
서비스 산업의 국경을 철폐하자는 당시의 시대적 요구 속에 자연스럽게 외국의 의사양성제도와 면허제도에도 관심이 높았다. 의협은 토론회를 비롯해 다양한 학술 활동을 통해 선진국의 면허제도를 접했다. 우리나라 의사의 해외 진출과 외국인 의사의 진입 을 살피는 과정에서 현대적인 면허기구의 필요성을 발견했으며, 공감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요청과 별개로 환자의 권리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의료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거나 의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자주 등장했다. 언론과 사회는 일부 의사 회원의 일탈을 열성적으로 부각하여 의사집단 전체를 나쁜 인상 심기로 왜곡시켰다.
문제를 일으킨 의사에 대한 징계나 행정처분의 취약성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보건복지부가 아닌 의사단체로 돌리는 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으다. 개인의 일탈을 의사집단의 책임인양 몰아세우고 있다.
너무나도 야심차고 과대망상적인 WTO DDA 협상은 2005년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WTO DDA 협상은 면허기구라는 새로운 단어와 의료의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초기 면허기구에 대한 논의는 의협 회원 내부에서 대단한 반감을 샀으며, 매우 격렬하고 험한 반향을 일으켰다.
면허기구가 생기면 의사면허 갱신을 위해 주기적으로 시험을 보아야 한다는 근거 없는 루머가 진실인양 퍼져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부 소수의 회원들이 의사면허·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주장했다. 하지만 한번도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실체를 본 적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면허기구의 설립과 추진은 곧바로 한계에 봉착했다.
2015년 일회용 주사기 재사용으로 집단감염 사고를 일으킨 다나의원 사건과 국소마취제 재사용으로 인한 C형 간염 전파 사건은 사회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보건복지부는 어떻게 하던 무엇인가 보여주기식의 대국회 면피용으로 전문가 평가제도를 급조해 시범사업을 추진했다.
언론이나 사회는 전문직 면허관리에 대한 지식이 없다보니 전문가 평가제도가 의사들을 감싸기만할 것이라는 비난을 이어갔다. 부정적인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국회는 보건복지부를 질타했다. 지금도 이런 시각과 현상은 바뀌지 않고 있다.
전문직 관리의 실제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보건복지부는 전문직 관리라는 매우 복잡한 사안에 대해 그리고 전문직업성에 대해 사전 예방·설득·교육 등을 할 수 있는 자체적인 기전이나 역량이 없다.
그럼에도 의사단체에게 면허관리를 넘겨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대한의사면허관리원이 끼리끼리 보호하는 단체가 될 것이라 속단하고 있다.
의사에 대한 행정처분 제도가 자리 잡지 못한 우리사회는 의료행위 과정에서 장애나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여전히 의사에게 형사법을 들이대는 야만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마치 이런 방식이 정의로운 것처럼 포장되어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엄밀히 논하면 의료행위는 고의성을 전제로 하는 형사사건이 될 수 없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다고 의사를 법정에서 구속하기도 한다. 의료에 어처구니 없는 형사처벌의 과도한 개입과 사법부의 권력 남용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은 의사의 의료로 인한 불만 사안은 우리나라처럼 경찰·검찰·언론·소비자보호원·환자단체·시민단체 등에 찾아가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공인한 의사면허 관리기구에서 담당한다. 선진국의 의사 단체는 의사 스스로의 이익과 신분보장을 위한 조합이나 노조 외에 환자와 사회의 보호 그리고 좋은 양질의 의료를 유도하기 위한 기구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2018년 제40대 의협 집행부가 출범할 당시에도 의료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는 지속해서 등장했다. 제40대 의협 집행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학문적 논의를 벌이는 대신에 상임이사회·시도의사회·대의원회 등 의료계 리더들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우리나라가 생각하는 상대적 후진국을 방문, 의사면허기구와 의사회를 살펴보기로 했다.
인도네시아·태국 의사면허기구 방문 연수를 통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의료계 리더들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도 면허기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말레이지아 면허기구 단기 연수와 독일·캐나다·미국 면허기구 방문을 통해 현대적 의사면허 관리제도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높였다. 의사면허기구의 필요성에 공감한 의료계 리더들은 우리나라에 어떻게 설립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의협은 당면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2019년 1월 의사면허관리기구 설립을 위한 TF를 조직했으며, 내부 토론회·국회 토론회를 비롯해 2019년 11월 제36차 의협 종합학술대회 국제 심포지엄의 하나로 '평생교육 및 전문직업성 개발'을 주제로 워크숍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면허관리에 대한 회원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4차례의 회의와 워크숍 그리고 해외 단기연수 보고회를 개최, 면허기구에 대한 이해를 한 차원 더 높였다.
2020년 7월에는 대한의사면허관리원 준비위원회를 결성, 여러차례의 회의·간담회·워크숍을 통해 면허기구의 미션·비젼·운영규정·자율규제와 관련한 의료법 일부 개정안 초안을 만들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료 현안에 대응하기 위한 단체행동과 코로나19 사태 등 예상하지 못한 사안이 벌어지면서 정부·여당·국회 등의 설득이 지연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제2차관제를 도입해 의사면허 관리에 대한 권한을 강화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국회는 의사파업 사태 이후 지속해서 의사면허를 제한하고, 규제하는 각종 법안을 쏟아내고 있다.
의협은 지난 1월 20일 기자회견을 열어 의사면허를 외부에서 제한하고 규제하기 보다 독립성·전문성을 갖춘 비정부 면허관리기구를 설립과 선진국 수준의 자율규제 획득을 목표로 2021년 면허관리원을 설립하겠다고 천명했다. 대한의사면허관리원(가칭) 설립 추진위원회 구성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