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광호 명예교수의 의사의 길-(10-끝) 21세기 한국의 의사상(醫師像)  

맹광호 명예교수의 의사의 길-(10-끝) 21세기 한국의 의사상(醫師像)  

  • 맹광호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예방의학)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1.04.11 22:00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폭넓은 사회성, 인문학적 덕목 갖춘 의사 지향 

21세기가 시작된 지 21년째다. 지난 20년 사이 지구상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80년이나 남은 금세기 안에 과연 어떤 일들이 더 일어날지 상상이 안 된다. 

그런데도 지금 '21세기 한국의 의사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존재하는 의학의 본질적 특성만은 변할 수 없다는 진실을 근거로 해서다. 

21세기에도, 22세기에도 변할 수 없는 의학의 본질적 특성, 그것은 바로 '의학적 지식과 기술', 그리고 그 의학의 대상인 환자에 대한 '휴머니즘'이다. 과거 문명 발달과정에서 때로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강조된 때도 있기는 했지만, 이 들은 언제나 함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문제는 이 두 특성의 균형일 뿐이다.

의학의 이런 본질적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학과 의술의 신(神),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Rod of Asclepius)다. 뱀 한 마리가 나무 막대기를 빙빙 감고 올라가는 형상을 보여주는 이 지팡이는 도구(나무)와 지혜(뱀), 즉 지식(Knowledge)과 지혜(Wisdom) 또는 과학(Science)과 가치(Value)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건 이 두 가지 특성이 함께 어울려야 의학은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의학의 과학적 발전은 이 균형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의학의 과학적 측면인 지식과 기술이 강조되면서 지혜의 측면, 즉 휴머니즘이 퇴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역시 1910년 미국 의학교육의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플랙스너 리포트, Flexner Report>와 무관하지 않다. 이 리포트의 핵심은 원래 의사 양성 과정에 해부학이나 생리학, 그리고 병리학 같은 기초의학 분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당연히 당시 미국 내 거의 모든 의학교가 그 기준을 따르기 어려운 상태였고, 이로 인해 결국 160여개나 되던 미국 전역의 의학교가 1935년에는 66개로 감소하는 큰 변혁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미국 의학교육의 변화는 곧장 전 세계적으로도 영향을 미쳤고 이를 계기로 의학은 과학적 측면의 발전을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 같은 의학교육의 과학화는 의학의 인성적인 측면에 대한 교육을 부실화했고, 이것이 결국 의료의 탈-인간화 현상을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1975년, 미국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는 의학이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모두를 의료화(Medicalization)해 가는 것에 대해 걱정하며 '의학적 재앙(Medical Nemesis)'이라는 부제를 단 <의학의 한계, The Limits of Medicine>를 출간했다. 이 책의 핵심이 바로 의학의 지나친 '과학주의'를, 그리고 이로 인한 의학의 '인간성 상실'을 우려하는 내용이다.   

이런 우려는 다행히 미국 의학교육에 반성의 기회를 제공했고, 그 결과물이 1981년 '미국의과대학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Medical Colleges, AAMC)'가 펴낸 <GPEP 리포트>, 즉 <21세기 의사상, Physicians for the 21st Century>이다. 이를 바탕으로 1995년에는 의학교육 행동목표(Behavioral Objectives) 성격의 <의과대학 학습목표 개발연구, Medical School Objectives Project, MSOP> 결과를 발표하는데, 이 연구보고서는 이타심(Altruism), 지식(Knowledge), 기술(Skill), 그리고 사회적, 법적 의무이행(Dutifulness)을 21세기 미국 의사가 갖추어야 하는 구체적 덕목으로 꼽고 있다. 

근대 서양의학이 도입되기 전, 우리나라 의료는 극히 원시적인 치료 기술과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돌봄'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1885년 미국 북장노회 선교 의사들이 중심이 된 <제중원>과 1907년 나라에서 설립한 <대한의원>이 문을 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서양의학의 과학적 측면이 본격적으로 강조되는 교육과 진료가 시작되었다. 특히 197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은 오늘날 한국 의학을 적어도 기술적인 측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당연히, 지식과 기술 교육에 치우쳤던 우리나라 의학교육도 1990년대 이후 이점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99년 '한국의과대학장 협의회'에서 발간한  <21세기 한국 의학교육 계획>과, 2014년 우리나라 의사양성 관련단체 대표들의 모임인 '한국의학교육협의회'에서 발간한 <한국의 의사상, 2014>이 이런 반성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의사상>은 장차 대한민국 의사가 전문직업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가치와 역량으로 '환자 진료', '소통과 협력', '사회적 책무성', '전문직업성', 그리고 '교육과 연구' 등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환자 진료에 관한 지식과 기술 습득만을 목표로 했던 의학교육이 이제는 점차 폭넓은 사회성과 인문학적 덕목을 갖춘 의사양성으로 진일보하고 있는 셈이다. 

21세기 남은 기간 동안, 인공지능(AI)이나 생명공학 기술, 그리고 컴퓨터 산업 등의 발달로 우리나라 의학기술이 더욱 눈부시게 발전하겠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한 인성과 사회적 책무성을 갖춘 유능한 의사들의 배출도 함께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해 본다. 
 

■ 칼럼이나 기고 내용은 <의협신문>의 편집 방침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