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권 설정하면서 '현장' 외면…행정구역·이동시간 잣대로 단순 접근
의료정책연구소 22일 토론회 "의료전달체계 확립·필수의료 격차 해소해야"
대한의사협회 40대 집행부 의료정책연구소의 마지막 화두로 '지속가능한 효율적 의료체계'였다.
의협 의료정책연구소는 22일 '지속가능한 효율적 의료체계 마련 토론회'를 열어 정부의 진료권 설정 정책을 점검하고, 지역의료체계 활성화 방안을 모색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진료권 설정은 단순히 행정구역이나 이동시간 차원에서 접근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의료전달체계 확립의 중요성도 되짚었다.
토론회에 앞서 안덕선 의료정책연구소장은 "정부의 진료권 설정에 대한 타당성을 검증하고 대안을 모색코자 한다"며 "완벽한 체계는 없다. 지나치게 세분화되지 않은 모델을 탐색하고 합리적 토론을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발제에 나선 성종호 의협 정책이사는 '정부의 진료권 설정 점검' 발표를 통해 ▲진료권 설정 범위 확대 ▲지역주민 생활권 감안 보정 ▲이송지원서비스 병행 ▲보건복지부 내 보건의료·응급의료 정책 파트 협력 등을 선결과제로 꼽았다.
성 정책이사는 "진료권 설정과 공공보건의료를 담당하는 정부 주관 부서가 다르다"면서 "고위험 산모·신생아·장애인 건강 상태 등은 사회환경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의료취약지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생활 현장이 아닌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진료권을 설정한 데 대한 문제점도 짚었다.
성 정책이사는 "정부는 인구를 기준으로 삼거나 지역을 넘는 진료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경직적 사고를 갖고 있다"며 "응급실 도착시간을 줄이겠다는 의도 역시 거리상의 문제가 아니라 '이송 지체'·'수단 지원'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바람직한 진료권 설정을 위한 의협의 진단과 처방도 소개했다.
성 정책이사는 "진료권 설정이 너무 좁고, 진료권과 생활권이 다른 경우가 많다"고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한 뒤 "지역책임병원은 의료취약지·2차병원형 지역에서는 불필요하다. 이송지원서비스 확대가 효율적"이라고 밝혔다.
행정구역상의 한계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119 역할 확대 ▲닥터헬기 추가 도입 ▲의료기관간 이송 지원 등을 제안한 성 정책이사는 "이송지원을 활성화 하면 막대한 비용을 투입해야 하는 지역책임병원의 필요성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울러 도서지역에 대한 접근 방식 강구, 보건복지부 내 보건의료-응급의료 부서 간 협력 등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발제를 맡은 문성제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원은 '미국 텍사스 메디컬 클러스터 사례' 발표를 통해 "지역책임병원에서 필수의료 격차를 비롯한 현실적인 제약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는 메디컬 클러스터와 같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 한계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문 연구원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미국 텍사스 메디컬 클러스터(TMC)는 의료기관 21곳, 교육기관 14곳, 연구기관 19 곳 등 54개 비영리 의료 관련 기관이 입주해 있다. TMC는 암센터(MD앤더슨) 세계 1위, 소아병원(텍사스어린이병원) 세계 1위, 연간 환자 방문 800만명, 연간 응급실 이용 환자 75만명, 총 고용자 수 10만 6000명, GDP 생산 250억 달러 등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파주 메디컬 클러스터와 노원 바이오 메디컬 클러스터를 추진하고 있다. 파주 메디컬 클러스터에는 아주대병원, 국립암센터 혁신의료연구센터, 의료바이오 R&D센터 등을 계획하고 있으며, 노원 바이오 메디컬 클러스터에는 서울대병원과 노원구가 협력해 1000병상 규모의 병원과 바이오·의료·헬스케어 기업을 유치할 계획이다.
문 연구원은 "지역책임병원이 현실적인 제약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는 메디컬 클러스터와 같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 한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면서 규모의 경제를 통해 의료 취약지역 낮은 환자 수요와 보건인력 자원의 투입난 해결, 클러스터화를 통한 네트워크 구축으로 의료전달체계 마련, 중증환자 이송지원체계 및 교통발달이 병원 거점보다 도시·단지 거점으로 이뤄질 경우 발전 가능성 제고, 특정 진료과목·필수의료 중점 클러스터 구축 등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메디컬 클러스터는 기존의 특정 의료기관을 지역거점으로 지정해 필수의료를 제공하는 것과 같이 중단기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대안은 아니지만, 국내 적용에 대한 다양한 장단점을 고려해 장기적 계획 수립에 충분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문 연구원은 "지역 경쟁구조가 아니라 공존할 수 있는 선순환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패널토의에는 신의철 가톨릭의대 교수(예방의학)·조승연 인천광역시의료원장·박진규 의협 기획이사 등이 참여했다.
신의철 교수는 공공의료에 대한 정부의 근시안적인 접근을 비판했다.
신 교수는 "정부의 공공의료 정책은 숫자를 늘리는 방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재 공공의료의 문제점을 숫자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며 "그러나 공공의료는 숫자를 늘려서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신 교수는 "공공의료가 모자란다고 공공의료대학을 만든다는 논리는 공무원이 모자라면 공무원대학을 만든다는 것과 같다"면서 "의료인이 공익적 의료에 몸담을 수 있는 틀을 만들고, 역할 수행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고 짚었다.
의료의 공공성 제고와 필수의료 서비스는 '형평성'이 관건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조승연 의료원장은 "공공기관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사적 시장에 의존하는 한국 의료현실을 공공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옮겨야 한다"며 "공공보건의료는 국민에게 제공하는 필수의료 서비스다. 형평성이 가장 중요하다. 필수의료 격차를 해소하는 데 의료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지역에는 훌륭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이 많다. 민간병원 역할을 어떻게 규정해서 필수의료서비스를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있지만, 큰 골격에서는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의료전달체계 확립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는 제언도 나왔다.
박진규 의협 기획이사는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면서 상급종합병원과 시골 병원의 의료비용 차이가 없어졌다. 지난 2018년 기준 상급종합병원의 의료비 증가율은 전년 대비 24%인데, 의원급 증가율은 10%에 그쳤다"며 "게다가 의료인은 수도권에 몰려 있는 반면에 지역에는 의료수요가 가득하다. 공급이 버텨낼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환자 이용행태를 거슬러서 제도를 운영한다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지적한 박진규 기획이사는 "단기간 행정지원에 한정할 게 아니라 환자가 늘수록 원활하게 의료기관을 운영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며 "의료전달체계 확립과 필수의료·야간 당직 가산 등 진료비를 늘리는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