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버스마다 환자의 발길을 이끄는 화려한 병원 이벤트 광고에 저절로 눈길이 간다. '고객' 중심 서비스 경영을 표방하는 의료기관은 대세가 된지 이미 오래. 각종 미용시술의 가격을 비교해주는 플랫폼 사업도 나날이 치열해지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의사나 의료기관을 '상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물음에 "아니다"라는 원칙을 못 박은 첫 대법원 판결이 지난 5월 26일 선고돼 그 판시내용을 중심으로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산부인과 의사 A씨와 신경외과 의사 B씨는 C의료법인이 2000년 3월 설립한 병원에서 각각 18년, 9년 가까이 일하고 2018년 2월 병원을 나왔다.
퇴사 이후 합심한 그들은 "재직기간 중 초과근무 부분에 대한 시간외 근로수당을 받지 못했고, 연차휴가를 사용하지 못한 데 따른 수당 및 이로 인한 퇴직금 차액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C의료법인을 상대로 임금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C의료법인측이 명시적으로 이를 다투지 않아 무변론 판결로 원고 승소했으나, C의료법인이 변호사를 선임해 응소한 항소심부터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다.
2심 재판부는 A, B씨의 시간외 근로수당에 대한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고, 연차휴가 미사용 수당과 퇴직금 차액 청구 부분만 인용해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원고와 피고 사이에 작성된 임금계약서상 격주 토요일 매월 고정적으로 발생하는 시간외 근로수당은 월 계약금액에 포함돼 지급되는 것으로 합의했으므로, 이 부분 시간외 근로수당을 별도로 청구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면서 일부 승소한 임금 부분에 적용되는 지연손해금은 퇴직일로부터 15일(퇴직금 지급 의무기간)로부터 2심 선고일까지는 상사법정이율인 연 6%를,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근로기준법상 체불 임금에 적용되는 연 20%를 적용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위 2심의 결론에서 상사법정이율 부분만 일반민사에 적용하는 연 5%의 법정이율로 고쳐 A씨에게 약 1억 1250만원, B씨에게 58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확정한 것이다.
의사·의료법인이 '자기명의로 상행위를 하는(상법 제4조)' 혹은 '장사를 직업으로 하는(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상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대법원 판시내용에 따를 때, 다음과 같이 의료법에 모든 답이 나와 있다.
'의사는 의료와 보건지도 임무를 수행하며 국민보건 향상을 이루고 국민의 건강한 생활 확보에 이바지할 사명을 가진다'고 규정하고(법 제2조 제2항 제1호),
의료인과 의료기관의 장에게 의료의 질을 높이고 의료관련감염을 예방하며 의료기술을 발전시키는 등 환자에게 최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노력할 의무를 부과하면서(법 제4조 제1항),
의사의 자격과 면허를 엄격히 제한하고(법 제5조, 제8조 내지 제11조 등),
정당한 사유 없는 진료거부를 금지하여(법 제15조) 계약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고 있으며,
(중략) …보건복지부 장관의 감독을 받는 한편(법 제6장), 의료행위와 의료 업무에 필요한 기재 등에 관하여는 법률상 보호를 받는다(법 제12조, 제13조).
-대법원 2022. 5. 26 선고 2022다200249 판결 [임금] 본문 발췌
참고로 대법원은 변호사의 경우에도 과거 유사한 취지로 변호사법 조문을 다수 언급하면서 '상인적 방법에 의하여 영업하는(상법 제5조)' 의제상인이 아니라고 결정한 바 있다(대법원 2007. 7. 26 자 2006마334 결정 [등기관처분에대한이의] 참조).
이같이 특정 직역 직업군에 대해 "상인이 아니다"라는 판시는, 전문직업인의 그 직무에 관한 고도의 공공성과 윤리성을 강조하는 선언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연 6%에서 연 5%로 1% 차이에 불과하나 해당 판결과 같이 원고가 지급 받을 지연손해금의 액수가 달라지기도 하고, 위 사례의 경우 임금채권에 관한 소멸시효 특칙인 3년(근로기준법 제49조)이 적용됐으나 임금채권이 아니라면 상사시효 5년이 아닌 일반 소멸시효 기간 10년이 적용된다.
가령 의사가 상인이라면, 상인이 하는 행위는 영업을 위해 하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의사 A씨가 친구에게 개인 용도로 돈을 빌려주든, 자신이 채무자로서 대출을 받든 상사시효가 적용돼 5년 뒤 상대방이 시효 완성을 주장하면 중단 등의 사유가 없는 한 돈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의사나 의료기관을 상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에 따라 일반 채권에는 민법에 의한 10년의 소멸시효기간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밖에 위 사건에서 시간외 근로수당은 격주 토요일 일정하게 발생하던 부분에 대한 것으로, 봉직의 A, B씨가 C의료법인과 체결한 임금계약서에 해당 내용이 비교적 명확히 명시돼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 수련의 사례와 차이를 곱씹어볼 필요도 있다.
수년 전 수련병원을 그만둔 인턴이 10개월간 밀린 시간외 수당 등을 달라며 K대병원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근로기준법을 적용해 병원측의 포괄임금 약정 주장을 배척하고 3000여만원의 지급 의무를 인정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