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근로, 특정과 문제 아닌 대부분 필수진료과 해당
잦은 제도 변화·의료사고 위험 의사 업무 가중...수가체계 정비해야
근로기준법, 의대교수 근무시간 개념 없어...노동자 권리 보장을
2019년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 당직을 서다 돌연사했다. 같은 해 가천대 길병원 소아청소년과 전공의가 과로로 숨지는 일이 발생하면서 당시 의사 과로사가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사실 두 사건에 앞서 2018년 6월 과로로 쓰러져 7월 26일 사망한 송주한 교수(46세·세브란스병원 중환자 전담의)는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들 세 사건을 잇는 공통분모는 '과로'라는 점에서 장시간 근로가 일상화된 병원의사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송 교수는 2009년 전문의 취득 후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중환자 전담의로 일했다. 2018년 6월 학회 참석 중 뇌출혈로 쓰러져 4년간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투병했으나, 끝내 운명을 달리했다. 2019년 8월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은 송 교수가 신청한 직무로 인한 재해승인신청건을 승인했다. 의대 교수로는 드물게 업무상 과로를 인정받았다. 송 교수는 '직무상재해 인정범위(재해보상운영기준 제13조)' 중 뇌혈관질병 또는 심장질병 조항에 해당, 만성적인 과중한 업무의 수행과 초과근무 등으로 육체적·정신적 과로를 유발해 발생하거나 현저하게 악화된 질병이라는 기준에 부합했다.
이번 송 교수의 사례는 365일, 24시간 운영하는 의료기관, 특히나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의 장시간 노동을 돌아보게 한다. 송 교수 처럼 과로로 인해 이후 사망이라는 불행한 사태로 가지 않더라도 의사들의 장시간 근로와 과로는 일상화돼 있다.
의료계에서는 병원의사의 경우 주당 근무시간이 60시간이 넘어 심뇌혈관질환의 산업재해 인정기준을 초과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세부적인 실태조사나 연구보고는 많지 않다.
2020년 대한중환자의학회 조사...국내 중환자 전담의사 소진 증후군 유병률 73%
송 교수 사건 이후 2020년 대한중환자의학회가 교수에서 전임의까지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253명의 의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살펴보면 의사들의 과로는 심각한 소진증후군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국내 중환자실 근무의사의 소진증후군 유병률은 73%에 달했다. 프랑스나 스위스 등 서구 국가가 33∼47%이고, 16개 아시아 국가 중환자실 전담의가 50% 내외인 것과 비교해도 월등히 높다.
조사 대상 중환자실 총 근무기간은 평균 5년이며, 월 근무시간은 평균 23일, 일일 근무시간은 평균 11시간으로 일반인에 비해 훨씬 많다.
이같은 장시간 근로는 중환자실과 같은 특정과만의 문제는 아니다.
2020년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전국의사의 통상 근무시간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의사 통상 근로시간은 48.1시간이지만 상급종합병원은 58.4시간으로, 종합병원 50.1시간, 병원 43.3시간, 의원 42.9시간에 비해 많다. 휴무일수를 제외한 실근무시간도 상급종합병원은 52.5시간으로 가장 많은 실정이다.
김대중 아주의대 교수(아주대병원 내분비내과)는 "장시간 노동과 이로 인한 과로는 중환을 보는 모든 과의 문제"라고 말했다.
"직원들은 오전 8시에서 5시까지 근무하고 1시간의 휴식시간이 있지만 교수의 근무시간은 따로 없습니다. 의사들은 집담회 준비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일과가 끝나도 남아서 연구나 논문 쓰는 일이 많다보니 장시간 일하게 되지만 이를 근무로 카운트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중환자를 진료하는 과는 문제가 더 커요. 자칫 의료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데다 더 큰 어려움은 환자가 잘못되면 소송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중환 담당교수나 전공의들은 이같은 부담 때문에 주말에도 환자 케어를 해야 합니다."
이런 위험 부담과 위험 관리는 병원 경영진이 해야 하지만 관행적으로 의사 개인에게 맡긴 채 방관하기도 한다. 중환을 치료하는 의사들이 장기간 노동과 과로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의료사고·의료소송 위험 관리 의사에게 전가...주말도 없이 환자 케어
제도적인 변화도 의사의 노동시간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환자의학회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중환자 전담의사들은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 시행 이후 전담 전문의의 업무량이 기존과 같다는 의견이 36%인 반면 증가했다는 의견이 63%에 달했다.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도입 이후 업무량이 증가했다는 의견도 57%였다(기존과 동일하다는 의견 37%). 더욱이 4명 중 1명은 이로 인해 우울감, 상실감, 스트레스가 평소 보다 증가했다고 답했다. 중환자실 의사뿐 아니라 생명을 다루는 필수진료과 의사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전공의특별법으로 전공의의 주당 근무시간이 1주일에 80시간이 넘지 않도록 하고, 연속 수련 후 최소 10시간의 휴식시간을 부여하면서 전공의 근무시간이 줄어 들었다. 입원전담의제도 등의 보완 조치가 이뤄지고 있다지만 대학병원내 교수와 임상의사 등에 대한 지원 대책이 없는 것도 근래 장시간 근로를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김대중 교수는 "상급종합병원의 의사수는 현재도 부족하다. 야간이나 주말이면 (환자를)방치하다시피해 의료의 질을 고려하면 더욱 부족하다"면서 "인력을 더 채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가가 원가에 못미치는 중환자실을 운영할수록 적자가 나다 보니 병원 경영진은 인력 증원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의사들이 떠안고 있다.
김장한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장(울산의대 교수·인문사회의학교실)은 "의대교수는 기본적으로 24시간 환자를 케어하다 보니 근로기준법상 근무시간 개념이 없다. 연차 휴가도 제대로 안주고, 환자 많이 보면 인센티브를 줘 금전적 보상을 했으니 됐다고 생각한다"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본적 제도가 상당히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의대교수 근무시간 개념 없어...권리 주장할 수 있는 기본적 제도 필요
경영진뿐 아니라 의대 교수 사회의 복잡한 위계도 장시간 근로의 요인으로 손꼽힌다. 강력한 위계와 도제라는 특별한 의료문화는 의사의 근로시간 장기화를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데 기여했다. 승진이나 교수가 목표인 임상의사들은 상급자인 교수의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못하고, 더욱이 펠로우들의 상황은 더 어려운 게 현실이다.
연장근무, 야간근무, 휴무 부족 등 장시간 노동은 의사 자신의 건강뿐 아니라 환자 안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외국에서는 의사의 장시간 근로가 환자의 안전과 의사 본인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해 대책을 모색하는 연구가 활발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구체적인 실태조사도 부족한 편이다.
김수근 성균관의대 교수(강북삼성병원 직업환경의학과)는 2016년 <의료정책 포럼> 기고를 통해 "병원의사의 근로시간을 줄이려면 진료수가체계의 도입을 도모하고, 가산된 진료수가가 그 취지에 따라 부담 경감이 필요한 진료과의 의사 증원과 의료발전을 위한 의사들의 동기 부여를 높이는 구조적 제도화"를 제언했다. 이와 함께 "의사와 의료계 역시 의료의 질과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과 생활이 균형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장시간 근로방지를 의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가와 제도 개선 못지 않게 의사들이 근로자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노동조합등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