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 6·25 한국전쟁…생명 걸고 부상자 치료
선진의학 접목…의학·교육 급성장 역사적 전환점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난 의료계는 1947년 조선의학협회를 창립하고, 전국의사회 중앙회 조직을 갖춰 나갔다.
전국의사회 중앙회로 인가를 받았으며, 조선의학협회지 창간호도 발행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에는 '조선의학협회'를 '대한의학협회'로 개칭했다. 1949년에는 세계의사회(WMA) 회원국에 가입하며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전쟁 발발로 위기를 맞았다. 전국 대부분 의료기관이 파괴되거나 문을 닫았다. 서울대병원 입원 환자·의사·간호사 등 1000여명을 도륙한 서울대부속병원 학살 사건(1950년 6월 28일)을 비롯해 3년 1개월 동안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참상이 벌어졌다.
전국의 의사와 의대생들은 부상자 치료를 위해 생명을 걸고 야전병원으로 달려갔다. 전쟁 와중에 상당수 의학자들이 납북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유엔군 150만명, 공산군 25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국전쟁은 부상병들과 난민 치료를 위해 의료지원에 나선 UN 참전국의 선진의학을 접목하는 계기가 됐다. 신경외과학·흉부외과학 등 외과학 분야는 물론 마취과학·병리학·혈액학 등의 의료 수준이 급성장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의학교육도 미국식 교과과정을 도입,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5·16 군사정변 해체 위기…의료법 첫 의사 정기신고
제7차 CMAAO 서울총회 개최…도약 위한 발판 닦아
환도 직후 의협은 1954년 6월 19일 총회를 열어 조직을 정비하고,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1954년 군진의학협회가, 1956년 한국여자의사회가 창립의 닻을 올렸다. 의협은 1955년 전문의제도 개선 활동과 1956년 '한지의사 승격'을 저지하기 위한 국민의료법 개정안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의협은 사회단체 재등록을 받지 못해 소급등록을 하기 전까지 한동안 해체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의협은 1961년 아시아오세아니아연맹(CMAAO) 가입을 시작으로 도약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1962년 국민의료법 명칭을 의료법으로 바뀌면서 의협 산하에 의료윤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의료법에 의한 첫 의사 정기신고를 진행했다.
1963년 관철동 회관 신축 이전, 1964년 유사의료업자법률안 저지 활동, 1966년 분과학회협의회(대한의학회 전신) 발족, 1967년 대한의학협회 공식 기관지 룈醫協新報룉 창간 등이 이뤄졌다.
1970년대 들어 의협은 1971년 제7차 CMAAO 서울총회 개최, 1972년 전문의 자격시험 이관, 1974년 이촌동 의협 회관 준공 등을 추진하며 도약을 위한 발판을 닦았다.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 대상 직장의료보험제도 실시, 1979년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 확대 등 의료보험제도 도입으로 의료계는 다시 한 번 격변기를 예고했다.
의협은 1979년 119의 전신인 '야간 구급환자 신고센터'를 운영하며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의사단체로서의 역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 사진을 클릭 하면 큰 PDF파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