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주최·한국의사수필가협회 12회째 주관...동상(한국의사수필가협회장상)
후원 서울시의사회·대한개원의협의회·대한의학회·한국여자의사회·박언휘슈바이쳐나눔재단
"너는 너 자신을 건강한 아이라고 생각하니?"
"네."
"맞아.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선생님도 그렇거든. 너는 심장이 조금 아팠던 것뿐이고 이젠 건강하다고 말해도 아무 문제없으니까 걱정 없이 잘 지내면 돼. 이제 여기 안 와도 된다. 졸업 축하해."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졸업이라고 말하는, 완치 판정을 받은 후 얼떨떨한 표정의 아이와 환하게 웃는 보호자, 그리고 오늘은 졸업하는 아이들이 많다며 잠시 미소 짓고 또 다른 환자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시는 교수님.
삶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병원에서 의사라는 직업을 막연하게 여겼던 나는 다양한 발자취를 가진 환자들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함을 느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부터 중장년층까지 찾아오는 소아청소년과, 그중에서도 선천성 심장병 등을 다루는 소아심장내과 의사는 환자의 일생을 동행하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의대생 대상 소아심장분야 실습 지원사업' 서울대학교병원 소아심장내과 2주 실습 경험을 담은 이 글은 어딘가 틀릴 수도 있지만, 의대생의 감성이 묻어나는 솔직한 기록이 될 것이다.
실습 기간 동안 내 몫으로 주어진 가운과 얼굴이 들어간 출입증을 받고 파란 시술복이나 초록색 수술복을 갖춰 입었다. 심혈관 조영실 내 심도자 시술 참관을 위해서는 이 위에 무거운 납복을 덧입어야 했다. 그 무게로 인한 허리 통증도 잊은 채 반복적으로 울리는 생체신호 기계음 속 분주히 진행되는 시술을 참관했다.
수술·시술 모두 전 과정을 직접 보고 스스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교수님 뜻에 따라 마취 과정부터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혈관 내로 카테터를 넣어 조영제 주입 후 X-선 촬영을 시행하는 혈관조영술을 통한 VSD·ASD device closure와 협착 부위나 혈류를 개선하는 풍선 확장술 및 스텐트 삽입술이 주요 시술이었다. 혹여 시술에 방해가 될까 멀찍이 떨어진 채 처음 듣는 의학용어와 시술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런 내게 레지던트 선생님께서 하시던 시술 보조 업무가 주어졌을 땐 '감히 내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이미 멸균복을 입기 위해 손부터 뻗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생리식염수 수액 팩에 연결된 줄의 압력을 조절해가며 환자의 피가 담긴 주사기를 세척하는 것이 익숙할 즈음 교수님께서 환자의 심장 결손을 막을 ASD Amplatzer Septal Occluder를 직접 보여주셨다. 카테터에서 나와, 활짝 펴진 채 제 모습을 드러내는 Amplatzer occluder와 시술 집도를 하시는 교수님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안의 뜨거운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의사의 길을 선택한 것에 가슴 벅참을 느낀 그 순간을 평생 잊지 않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동시에, 환자에게 어떤 말을 건네주는 의사가 될지 고민했다.
DCMP로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스텐트 삽입에도 혈관이 좁아져 풍선 확장술을 시행해야 했던 한 환자가 있었다. 부분 마취로 시술 전 과정을 온전히 자각해야 하는 두려움과 ballooning 순간의 고통이 겹쳐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아이에게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술 직후, 보호자 대기 공간에서 손을 모으고 기다리는 엄마를 보자마자 그쳤던 울음이 다시 새어 나오는 환자에게 내가 의사였다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심에코실도 저마다의 간절함을 담은 환자들이 수없이 오고 가는 공간이었다. 캄캄한 어둠을 은은한 주황빛으로 채운 조명 아래, 젤이 묻은 probe가 가슴에 닿는 것이 낯설어 우는 아이와 금세 적응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누워있던 침대를 산모와 3,40대 성인이 채우기도 했다.
그 환자를 만난 건 실습 마지막 날이었다. 심장 박동에 따라 빨, 주, 노, 파로 물드는 하얗고 까만 초음파 영상을 알아보지 못해 답답하던 실습 초반을 지나 long/short axis view, five-chamber view 등을 보고 어느 부위에 병변이 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어 뿌듯해하던 찰나였다.
한 아이의 아버지인 환자는 아내와 함께 심에코실을 찾았다. 초음파 검사 내내 조용한 기류가 흘렀다. 평소엔 교수님께서 따뜻한 목소리로 병력 청취를 하시거나 아이의 학교생활, 보호자의 가족 이야기 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이끄셨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판 증후군(Marfan syndrome)이 맞는 것 같습니다."
"네? 제가 마판 증후군이라니…"
Marfan syndrome은 15번 염색체에 위치한 FBN1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해 발생하며 증상으로 안구 수정체 탈구 및 근시, 심장기형 등이 나타난다. 긴장하던 보호자는 소리 없이 얼굴을 감쌌다. 짐작했던 바가 사실이 되었다는 충격은 환자와 보호자 모두에게 절망으로 다가온 듯했다. 조용히 달래주시는 교수님 뒤에서 나는 눈물을 꾹 참았다. 교수님께서는 환자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제가 아이가 있는데 혹시 그 아이도…"
"100%는 아니에요. 그래도 한번 내원하셔서 아이도 검사를 한번 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환자 분 증상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어서 관리만 잘하시면 크게 문제가 없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담담하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질병의 기전과 앞으로의 방향을 설명하시는 교수님을 보며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떠올렸다. 시험을 위해 외운 2차원의 텍스트가 3차원의 현실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흔드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경험하는 건 '환자의 아픔에 공감한다'라는 추상적 개념을 받아들이는 첫 걸음이 되었다.
그리고 환자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말 속엔 최선의 치료를 제공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이유 없이 행해지는 치료는 없다. 거기엔 밤낮없이 일하는 의사들의 노고가 들어있었다.
소아청소년과 PGR에서는 하나의 Case를 두고 Present illness, Past medical history, Laboratory findings, 조직 검사 결과, 심전도, 초음파 영상, 치료 time line을 철저하게 분석한다. 전공의의 발표와 교수님의 질문, 더불어 교수님의 발표와 논의 과정을 50명이 넘는 의료진과 공유한다. 과 특성상 소아심장내과는 소아흉부외과와도 긴밀한 연결고리를 맺고 있는데, 매주 1회 열리는 Pediatric Cardiology Conference에서 두 과의 교수님이 한데 모여 치료법이 다양하거나 난해한 환자별로 적절한 치료 방향을 모색한다. 커다란 홀에 둘러앉아 상호 신뢰와 존중을 토대로 치열하게 토의하는 교수님들은 몇 시간 동안 지속되는 컨퍼런스에도 지쳐 보이지 않으셨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했던가, 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도 셀 수 없이 많은 의사들이 진심을 다한다.
이날 나는 수술실에서 살아있는 심장을 봤다. 작은 몸에서 강렬하게 뛰는 심장은 생명의 힘을 보여주는 듯했다. TAPVR 수술은 심장을 정지시켜 인공심폐기로 Cardiopulmonary bypass를 시행해야 한다. 그 짧은 시간 내 손톱보다 작은 바늘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교수님의 손놀림에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날 선 분위기 속 조그마한 심장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을 흉부외과 교수님은 스스로를 완벽함의 한계로 몰아넣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한
계 상황에서 아이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고 교수님은 바로 옆 수술방으로 건너가 다음 수술을 시작하셨다.
심장은 섬세한 장기이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조화가 깨지면 무너진다. 하지만 심장병을 안고 태어나더라도 소아심장질환 치료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사가 있기에 오늘도 수많은 심장이 각자의 리듬으로 박동한다.
의대생으로서 첫 번째 터닝 포인트였던 서울대병원 소아심장내과 실습은 환자를 질병이 아닌 인간으로 볼 준비를 하게 했다. 더불어 병원에서 만난 우리 학교 선배님과 전공의 선생님들은 그곳에서의 기억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심장에 대한 개인적인 애착도 커져 나는 해부실습 내내 심장만 붙들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가다 보면 어느덧 의사로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을 때가 올 거예요."
담당 교수님께서 나에게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며 건넨 말씀이다. 나는 시간만이 나를 의사로서 성장시키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의사로서, 한 명의 좋은 사람으로서 성장하며 겸손한 자세로 실습을 통해 배운 태도를 실천하고 싶다. 오늘따라 내 방 한 켠에 자리한 수료증에 눈길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