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치료사 독립적 의료, 간호사·약사 일차진료 참여·한의사 현대적 의료기기 사용
대책 수립·실행 위한 상설 기구 필요…의협 전문성·지속성 문제 극복해야
서양의학은 노동의 분화(division of labor)과정을 거치며 다양한 보건의료직종으로 발전하여 왔다. 보건의료직에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직군이 나타날 것은 예측 가능하다.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보건의료직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의사·간호사·약사가 서로 다른 사안으로 영역 투쟁(turf battle)을 벌리고 있다. 그 밖에도 물리치료사·응급구조사·검안사·조산사 등 보건의료직과 최근 유럽에서 비보건의료직(non-health professional)인 IT 전문가와 영상의학 전문의가 갈등을 보이고 있다.
이런 직역 간의 영역 투쟁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허술한 법과 제도도 원인이다. 직역 간의 활동범위(scope of practice)가 명확하게 구분이 되거나 기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의료법이 의사·한의사·치과의사·간호사·조산사를 하나로 묶어 별도로 정한 법체계인데 사안에 따라서는 5개 직종이 묶여 있는 것이 유리하기도 하고 사안에 따라서 직역별로 별도의 법이 없는 것이 불리하기도 하다. 간호사들이 간호법을 줄기차게 추진하는 이유는 사실상 별도의 간호사법을 제정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작업이다.
그러나 의료법이 의료인법이 아니듯이 간호사법은 의료법과 형평성의 문제로 부득이 간호법으로 추진되고 있다. 약사법(the pharmaceutical affairs law)은 약사(藥師)라는 전문직 종사자가 아닌 약사(藥事)에 관한 일들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필요한 사항을 규정해 국민 보건 향상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데 한자(漢字)어를 한글로 표기하여 한자를 모르는 세대에게 혼돈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 의료법은 직역별로 법을 갖고 있지 않고 직역의 정의와 명확한 활동범위(scope of practice)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로 보인다. 반면에 5개 직종이 묶여 있으니 직종별로 모두 합의하지 않는 한 어느 특정 직역이 자신들을 위한 별도의 법안을 단독적으로 추진하기에는 법체계의 훼손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미국은 오바마케어로 나타난 의료보험 수혜자가 급격히 증가해 의사 부족 사태를 유발했고 이어진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하여 의사 부족 현상이 가중됐다. 의사가 없는 지역이 많이 있고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수의 외국 의사가 진입했으나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미국은 의사 공급 부족의 틈새에 간호사 중에서 고등 수련을 받은 ANP(Advanced Nurse Practitioner)와 의사조수(Physician Assistant)가 일차진료를 담당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영토가 넓고 주마다 법과 제도가 달라 모든 미국의 주가 허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나 관료의 시각에서는 의료인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불안전한 의료를 우려하는 의사의 목소리에도 이들 비의사(non-physician)에게 일차진료를 허용했다.
미국은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릴 때 예방접종의 다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사의 예방접종도 허가했다. Advanced Nurse Practitioner나 Physician Assistant에게 일차진료를 허락했으니 약사도 직역 범위의 확대를 시도 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의 일본식 서양의학교육에서 해방 이후 미국식 보건의료인 양성제도가 벤치마킹의 대상이 됐다. 우리나라는 주변국과는 달리 간호교육을 4년제 대학으로 일원화에 성공한 것을 보면 교육을 통한 간호사의 지위 상승의 시도도 놀랄만한 사안은 아니다. 미국에서 보여주는 간호사 역할 확대가 미치는 국제적인 영향도 클 것으로 예측된다.
영국에서는 한동안 조산사에 의한 신생아와 산모 사망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직종 간 존재하는 자존심과 기싸움으로 조산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분만 환자를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신속히 의뢰하는 것이 지연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의사들도 이런 경로의 환자 의뢰를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조산사를 의료인으로 양성하나 산부인과와의 경쟁과 저출산에 조산사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다. 최근 유럽에서는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귀하고 너무 바빠 인공지능에 의한 방사선 판독이 더 정확하다는 시대적 변화를 내세워 방사선과 전문의 영역에 대한 IT 전문가의 침투가 직역 투쟁으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응급구조사의 초음파 사용 허용에 관한 건도 아직 사회적 통념과 안전한 의료에 대한 우려로 무산됐다. 미국의 응급구조사는 1년 정도 훈련으로 양성되고 대학교육 과정도 아니나 우리나라 4년제 학사 응급구조사보다 활동 범위가 넓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영토가 큰 미국·캐나다·호주 등과 같은 나라의 의사 부족과 우리나라의 의사 부족이 보여주는 현상은 매우 다르다. 보건의료직종이 자신의 교육제도를 통한 역량 강화로 활동 영역의 확대에 대한 견제는 쉽지 않다.
만성적 의사 부족 지역에 대한 타 직종 대체 시도도 마찬가지로 견제가 매우 어렵게 보인다. 의사의 프로페셔널리즘의 수호를 위해서는 의사 양성제도도 주기적으로 검토해야 하고 시대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
의사가 했던 임신검사가 소비자가 직접 간단히 해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의사의 역할이 소멸하는 분야도 생길 수도 있고 다른 직종에게 대체되거나 위임(delegation)이 될 수도 있다. 의사의 경쟁력은 다른 보건의료직과 비교 불가능한 수준의 가장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추구하는 수월성을 바탕으로 발전해야 한다.
물리치료사의 독립적 의료·간호사·약사의 일차진료 참여, 한의사의 현대적 의료기기 사용 등 보건의료직의 활동범위(scope of practice)의 변화를 요구하는 직역 투쟁(turf battle)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인데 대한의사협회는 이에 대한 대책 수립과 실행을 위한 상설적 기구 운용이 필요해 보인다.
의사의 직무수행에 타 직종과 협업하여 상호 보완적이며 쌍방이 win-win 할 수 있는 정책도 개발해야 하는데 견제와 협업 모두 3년마다 집행부가 바뀌는 대한의사협회의 전문성과 지속성의 문제를 극복할 때 가능한 것이다.
직역 투쟁의 사안마다 의사단체의 간헐적 1인 시위나 성명서도 중요하나 궁극적으로는 명확한 직역 영역 확보를 위해 의료법 체계 현대화의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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