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위급한 소아 혈액암 환자에 탕약 처방 현실...실체 알려야
의사단체, 규범 제시하고 사회 설득…의사 '직업윤리' 실천해야
한의사의 초음파기기 사용이 무면허 의료행위가 아니라는 최근 대법원 판결 이후로, 초음파기기뿐 아니라, 혈액검사, 방사선 검사 등 다양한 현대의료기기를 한의사가 사용해도 무관하지 않냐는 견해가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밥그릇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의사와 국민은 "한의사도 환자를 과학적으로 진료하기 위해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하려고 하는데, 무엇이 문제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 칼럼에서는 이런 주장이 왜 과학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철학적 분석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중세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뉴턴의 과학혁명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는 과학 기술의 거대한 발전을 경험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지구 밖 먼 거리 우주와 아원자 단위 미시 세계의 실체를 밝혀내고, 생명과학에서의 발전은 생명체를 분자 단위의 유전자 정보로 환원하여 의학적으로 이용하는 데 성공했고, 노화 방지와 불치병 치료와 같은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단순히 고도화된 기계 장비들을 인류가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장비들을 이용하면서 얻게 되는 특정 수치나 영상, 수많은 결과물과 정보들을 관련 학자들이 과학적 연구방법론이라는 틀 안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예상과 다른 결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하며, 과학자들끼리 팀을 이루어 서로 투명하게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룬 것입니다.
즉, 고대 철학자 플라톤이 제안한 이데아로 비견되는 우주를 관통하는 완전무결한 원리가 세상에 존재하고, 이를 인간의 착각이나 편견을 배제한 첨단 기술 장비로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에 알려진 기초 과학적 이론과 실험적 발견, 기술적 오류들을 맞춰가고 수정해 나가면서, 이를 바라보는 과학자들의 합의가 이뤄질 때 비로소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일찍이 [과학 혁명의 구조]의 저자 토마스 쿤은 과학의 이런 특성을 통찰하고,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마치 정박할 수 있는 항구도 없이 계속 수리하면서 항해해 나가는 배와 같이, 과학이 발전해 왔고 앞으로도 같은 방식으로 발전해 갈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과학이 인간의 합의로 이뤄지는 측면이 있다고 해서, 사이비 유사 과학이 용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과학적 연구방법론에서는, 조작적 정의에 따른 가설을 세우고, 사례 연구가 아닌, 통제된 대조군과 비교군을 설정한 실험을 통해 반증 가능한 이론을 만들며, 이를 재현 가능한지 동료 평가를 받습니다.
의학은 생리학, 병리학, 분자생물학 등 다른 연관 학문과도 정합하는지 확인하는 연구 방법 과정을 따르게 됩니다. 만약 어떤 현상에 대해 상반된 이론이 있을 때, 어떤 한 이론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과학적 사실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를 지지하는 보다 많은 근거와 다른 과학자들의 동의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특히 최근에는 과학 철학에서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이라는 비교적 새로운 학문 분야가 생겼습니다. 과학기술학에 의하면, 과학에는 자연의 물질이나 인간이 만든 물건과 기술을 이르는 '비인간 요소'들과, 행위의 주체인 '인간 요소'들이 서로 다양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인간-비인간 요소들이 촘촘하고 견고하게 짜인 네트워크일수록, 일부 이차적인 이득을 노리는 개인들의 경제적인 욕심이나 명예가 개입할 여지가 적고, 보다 객관적이며 학문적으로 많은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과학자가 자신의 양심이나 책임을 지키기 위해서는, 과학자뿐 아니라 정책과 제도를 만드는 정치인, 법리적인 해석을 다루는 법률가, 그리고 정보가 부족한 일반 시민까지 포함된 '인간' 네트워크를 광범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자연환경과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 기술과 도구들로 이루어진 '비인간' 네트워크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과학기술의 결과물이 다시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 개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인간게놈프로젝트, 인간뇌프로젝트 등 거대 과학프로젝트들을 생각하면, 이제 과학은 과학자만의 영역이 아닙니다.
자, 다시 한방 초음파 사용 대법원 판결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이 사건의 한의사가 2년간 68회에 걸쳐 초음파 기기를 매우 비의학적인 방식으로 이용해서 환자에게 부정확한 자궁내막 두께를 보여주고, 안전성과 유효성을 확인하지 않은 한약을 처방해 왔으며, 정작 가장 중요했던 자궁내막암으로의 진행을 놓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의사 국가고시 문제를 통해서는,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의 검사 결과를 현대의학의 진단명을 사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결국에는 한약을 치료법으로 제시하는 패턴을 확인했습니다. 심지어 이런 형식의 문제에는 생명이 위급한 응급 상황에 놓인 소아 혈액암 환자에게도 탕약을 처방하는 것이 정답인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의사들이 이렇게 전혀 과학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방법으로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하여 환자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우리는 논리와 합리로써 법관, 정치인, 국민을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기와 경락, 혈과 같은 반증 불가능한 이론을 주장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거 사례만을 강조하며, 한방의 비과학성을 비판하는 것을 동양인 비하 또는 친일사대주의로 매도하거나, 결국 현대의학도 한계가 있지 않냐며 논점을 흐려왔던 한의사들의 전략이 먹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후 온난화를 부정하거나, 예방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한다고 주장하는 과학 부정론자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전략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완벽한 이성적 논리로 한의사의 주장을 깨부수고 국민을 설득한다면, 대한민국에 한방과 사이비 의료를 몰아내고, 과학적인 의료를 구현해낼 수 있다고, 너무나 큰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가진 인지적 편향을 완전히 없애지 않는 이상, 앞서 과학기술학(STS)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과학이 인간-비인간 네트워크 안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미국의사시험(USMLE)의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과 의료윤리(medical ethics) 과목에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말기 암 환자가 진료실에서 사이비로 의심되는 근거 없는 치료법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의사들도 아직 한방에 맹목적인 믿음이 형성되지 않은 환자들이나 국민을 대상으로, 진료실이나 작은 지역사회 단위에서부터,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안내하는 것이 느리더라도 가장 확실하고 저항이 적은 방법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한의사 면허는 어차피 계속 있을 테니까, 아무리 설득해도 어차피 안 바뀌니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런 접근 방식이야말로 아무것도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가장 최악의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은 실천이라도 의사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조직화한, 책임감을 갖춘 대한의사협회와 같은 의사단체만이 전체로서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고, 이를 의사 회원에게 교육하며, 문제가 있는 회원들을 교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의사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사회에 대해서 떳떳하게 요구사항을 제시하거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게끔 사회를 설득, 압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77년 미국 최초의 주 면허법은 주 정부가 원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시 미국 앨라배마주 의사회에서 정부를 설득하여 돌팔이들을 의료에서 배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의료계의 현안들로 의사들이 힘든 상황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조직화와 책임감을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사의 직업윤리를 우리가 놓치지 않는다면, 성숙한 의료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참고 문헌]
1. [과학 혁명의 구조] 토마스 쿤
2.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3.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홍성욱
4.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리 매킨타이어
5. [전문직 윤리로서의 의료윤리-의사다움이란] 권복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