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희 교수 "포괄수가제, 진료 재량권·신기술 접근성 제한" 짚어
의료윤리연구회 4월 3일 월례모임 '지불체계 쟁점' 의료윤리 고찰
"의협, 보험·정책 전문가 키우고, 중장기 정책 연구 제안해야" 조언
건강보험 지불체계가 행위별수가제에서 포괄수가제(Diagnosis Related Groups) 형태로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포괄수가제가 안고 있는 과소 진료와 서비스 제약 등 의료윤리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도 제시해야 한다는 조언에 무게가 실렸다.
포괄수가제는 진료건당 진료비를 지불하는 현행 행위별 수가제와 달리 질병건당(외래방문당·입원일당·입원건당 등) 묶어서 지불하는 진료비 지불제도의 한 형태다. 질병건당 가격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환자에게 투입해야 하는 의료 기기·장비·기구·의약품 등 의료서비스를 줄일수록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다.
의료윤리연구회는 4월 3일 이촌동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제118차 월례모임을 열고, 한국의 의료체계를 배분적 정의(분배적 정의)와 의료윤리의 관점에서 고찰했다.
월례모임 주제강연을 맡은 이선희 이화의대 교수(예방의학교실)는 '건강보험 보수지불체계와 쟁점-배분적 정의 관점에서'를 통해 한국의 건강보험체계를 설명하고, 의료윤리적 딜레마를 짚었다.
포괄수가제 확대와 관련해 이선희 교수는 "의료전문가들은 포괄수가제 하에서 과소 서비스에 대한 유혹에 시달려야 하고, 최상의 서비스 제공 장벽이 높은데다 신의료기술·첨단기술에 대한 접근성 제약으로 의료윤리적 갈등을 겪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보건복지부·국무총리실·인사혁신처 등에 정부 자문으로 참여하고, 대한의학회 정책이사, 보건의료연구원장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 (신)포괄수가제로 전환…흐름 막을 수 없지만 단점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이 교수는 "정책결정자의 관점에서 포괄수가제는 심사청구 등에 있어 행정적으로 간편하다. 정부는 많은 문제에도 포괄수가제를 계속 확대할 방침"이라면서 "포괄수가제를 전면 거부하거나 선불제·후불제를 선택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고 진단했다.
이어 "다만 정책을 추진할 때는 강점을 강화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의료보수 지불체계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들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포괄수가제의 문제점으로는 △지불 정확성 등 정책 타당성 문제 △의료소비자(환자)와 의료공급자(의사)의 선택권 문제 △수가 및 의사결정에 있어 의료공급자의 취약성 등을 짚었다.
이 교수는 "최근 진료비 지불은 진료량뿐 아니라 의료서비스의 질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면서 "좋은 서비스에 보상하는 것이 아닌 미흡한 서비스에 페널티를 부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의료진의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전세계 많은 나라에서 '신포괄수가제' 등 행위별 수가제와 포괄수가제를 혼합한 형태를 채택하고 있다"며 "현 시점에는 혼합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선에서 절충점을 찾을지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포괄수가제의 맹점…진료재량권, 환자 선택권, 의학 신기술 도입 및 발전 저해
이 교수는 포괄수가제에 대해 의료윤리적 관점에서 "의료인을 매양 윤리적 시험대에 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안타깝다"며 화두를 던졌다.
미리 가격을 결정하고 추가적 비용 발생 시 진료제공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포괄수가제에서, 의료인의 입장에서 어떤 서비스를 제공해도 이미 책정돼 있는 가격을 받는다. 이런 체계가 의료인의 과소서비스의 유혹과 경계영역 서비스 제공 여부를 놓고 갈등을 부추긴다는 것.
또 '평균값'을 책정함으로써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중증도 높은 질환은 의료인이 손해를 책임지는 구조라는 점도 지적했다. 경한 환자를 볼 때 남는 것으로 중한 환자의 손해를 메꾸라는 취지이나, 간단한 질환이라도 스펙트럼이 넓어 손해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의료제공자에게 손해를 보면서까지 환자를 보라 강요하며 비난할 수는 없다. 포괄수가제에서 끊임없이 시험대에 올라야 하는 의료인 입장에서는 차라리 돈을 덜 받더라도 행위별 수가제(후불제)로 하는 것이 마음이 더 편할 것"이라면서 "일본에서는 DPC제도를 통해 중한 환자의 의료비를 따로 보상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행위별 수가제가 의료인과 환자에게 모두 유익이 될 수 있다고도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의료인은 최선의 의료서비스로 소신 진료가 가능하고, 고급 의료기술과 신기술을 얼마든지 도입해 활용할 수 있어 발전성과 생산성이 높다"면서 "환자 역시 새로운 기술에 따른 의료서비스를 선택해 제공받을 수 있어 의료의 질과 선택권이 제고된다"고 밝혔다.
행위별 수가제의 부작용으로는 행정적 간편성이 떨어진다는 점과 과잉 진료·투약 등으로 의료비 상승 우려가 있다는 점을 꼽았다.
■ 양질 의료 수요 높아져…의료계에서 포괄수가제 보완점 고민·제언해야
주영숙 전 의료윤리연구회장은 의료정책연구소의 진료비 지불제도 대응 전략에 관해 조언을 요청했다. 이선희 교수는 "의료정책연구소의 역할이 중요하다. 단기적 대응방안뿐 아니라 의료계에 필요한 정책을 단기·중기·장기로 나누고, 내부 인력만으로 한계가 있다면 의료정책을 잘 알고 있는 외부 인력과 함께하는 등 전략적 운영을 고민해야 한다"고 답했다.
"의료계에서 설득력 있는 논리구조와 타당한 정책을 제시해 심평원과 정부 정책에 반영토록 해야 한다"고 밝힌 이 교수는 "모 학회는 보험위원회 임기가 5년으로 길어 정책 관련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관련 직책의 임기를 따로 두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이연 의협 홍보이사 겸 대변인은 "협회 내부에서 논의 중이나, 현재도 많은 안건들이 들어와 있고 말씀해 주신대로 집행부 안정성 문제도 있어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수행하기엔 벅찬 것이 현실"이라면서도 "해당 현안에 대해서는 의료 질 저하로 가지 않도록 경영의 논리에서 벗어나 기술적·정책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명진 의료윤리연구회 초대회장은 "의료계의 제언이 힘을 얻을 수 있는 내부적 합의와 외부적 정당성이 필요하다"면서 "경제적 논리보다 배분적 정의에서 윤리적 문제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의사의 전문성과 환자의 유익을 함께 살릴 수 있지 않겠냐"며 아쉬움을 표했다.
문지호 의료윤리연구회장은 "항상 통제받고 손해 보는 입장이라 생각해 억울한 마음만 가득했다. 강의를 통해 우리나라 의료체계가 발전해온 이야기와 여러 요소를 고민하다 보니 개원의 입장에서 공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며 소회를 남겼다.
한편, 의료윤리연구회는 5월 15일 월례모임에 이상운 의협 보험부회장을 초청, '필수의료의 배분적 정의'에 관해 토론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