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 불능 '보건의료발전계획'·'지역보건의료계획' 의무 규정…관치 한계
보건의료정책 거대 담론 확정, 목적·세부 계획 바탕 보건의료 자원 정해야
보건의료정책 '협치' 필요한 복잡하고 어려운 사안…득표 위한 구호 '혼란'
한국·미국·일본·타이완은 인구 1000명당 의사 수에서 2.5∼2.6 정도로 매우 근사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국토의 넓이와 의료 형태와 의료소비 문화는 사뭇 달라서 미국과 같이 거대한 영토의 나라와 우리나라나 타이완 같은 적은 영토에서 보여주는 환자 대기 현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 2022년 최근 자료에 의하면 평균 환자 예약 대기 시간은 약 26일로 2017년 이후 8%, 2004년 이후 24% 증가한 수치다. 초진을 위한 대기 시간이 우리나라의 문화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국민은 초진 대기 기간이 1주일만 넘겨도 온 나라가 소란할 것이고, 정권 퇴진 운동이 시작될 것으로 짐작된다. 미국에서 의사 예약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의사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는 중요한 지표라는 의견에는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예약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는 의사가 넘치는 결과인가? 궁금하기 그지없다.
미국의 전문의 대기 시간은 상황이 더 나빠 피부과의 경우 2022년 평균 예약 대기 시간은 34.5일로 2017년 조사보다 7% 증가했다고 한다.
산부인과의 대기 시간은 일반적인 환자가 예약을 위해 31.4일이었다. 조사대상 도시별 격차도 심하여 이중 필라델피아는 56일이었고 가장 짧은 대기 시간은 뉴욕시에서 19일이었다. 조사대상이 주로 대도시였는데 아마도 시골 지역의 사정은 더 나쁠 것으로 보인다.
대도시는 인구당 의사 비율이 높은데도 예약 시간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상황이다.
가정의학은 다른 과와는 달리 대기 기간이 감소됐다. 2022년 일반 환자는 가정의를 만나기 위한 대기 기간이 20.6일로 2017년의 29.3 일에서 30%나 감소한 것이라고 한다.
대기 기간의 감소는 긴급 치료 센터와 자영업 클리닉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결과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도시마다 편차가 커서 포틀랜드의 가정의학 대기는 평균 44일이나 됐고 수도 워싱턴 DC는 8일로 가장 짧았다고 한다.
1000명 인구 당 의사 수를 놓고 보면 미국이 우리보다 약간 더 높은 편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월등한 신속 진료가 어떻게 가능한지 명쾌한 과학적 설명이 어렵다.
우리나라 의사 부족에 대한 논의에서 현재 우리나라 의료의 최고의 접근성도 더 구체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신속성에 대한 반대급부의 희생과 단점은 무엇인지? 의료전달체계 확립이 잘 되고 있지 않은 나라에서 역으로 보여주는 최고의 접근성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우리나라와 같은 강압적 저수가 의료보상제도는 의료 공공성이 강한 다른 나라와 같이 명확한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없다는 가설도 성립할 수 있어 보인다.
그러나 신속 진료의 한계를 보여주는 필수 의료의 붕괴 현상은 서서히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이 과연 의과대학 정원 증가나 의대 신설로 해결이 가능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문제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보건의료인력에 대한 지표는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총 의사 수를 늘리면 된다는 매우 전문성이 결여되고 과도하게 단순화된 막연한 정책이다.
우리나라는 국가의 합의로 결정된 의료의 목표나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군사독재 시대부터 지켜온 저수가 바탕의 보장성 강화 정책이 우리의 의료 문화로 정착되며 오로지 저비용의 신속 의료가 강점으로 나타났으나 필수 의료 붕괴 등 현재의 의료가 지속 가능한 것인지 불안하다.
정작 야당과 정부는 평등에 입각한 의료 공공성 강화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의대 설립이 강화방안을 위한 중요한 방법론으로 등장시키나 환자의 자유선택권은 불가침으로 선거에서 표심을 잃으려 하지 않는다. 정치권이나 정부는 의료 공급의 공공성 통제 강화를 주장하나 의료소비는 통제하려 하지 않는 이율배반적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공공성과 평등성 강화로 만성적으로 제기되는 지방 도시의 의대 설립이나 KAIST나 경찰 등 특수 목적 의대 설립에 대한 요구는 전문성보다는 정치적 팬덤 형성이 주된 정치적 쇼와 가깝다.
의대를 설립하던 의사 정원을 조정하던 한 국가로서 의료에 대한 거대 담론을 바탕으로 제기돼야 하는데 사건, 사고 중심의 즉흥적 땜질 정책이 횡횡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 제정한 보건의료기본법에 따라 보건복지부 장관이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의 협의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건의료발전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보건의료기본법 제정 이후 23년이 지나도록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한 적이 없다.
2021년 6월 발표한 제2차 공공보건의료 기본계획(2021∼2025)은 보건의료발전계획이 아닌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공중보건과 공공의료 강화를 통한 필수의료 대책이 주된 내용이고, 단골 구호인 거주지에서 안정적인 필수 의료를 받는 것이 목표이다. 여전히 다양한 보건의료인력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우리나라 의료법에서는 보건의료발전계획이 확정되면 이를 기초로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특별자치도지사 및 시장·군수·구청장(자치구의 구청장을 말한다)은 관계 법령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의 실정을 감안해 지역보건의료계획을 수립·시행해야 하는 것이 법적 의무사항이다.
하지만 실행 불가능한 일을 그리고 지키지도 못할 정부의 역할을 법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최단기간 국민 전체에 대한 보장성 확보와 저수가 정책 그리고 공공성 강화 이외는 보건의료계획의 국가적 발달 정지가 우리나라 보건의료의 민낯이다. 관치의 한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 나라의 보건의료 정책은 의료에 대한 거대 담론이 우선 확정돼야 하고 합의된 명확한 목적과 구체적 세부 계획을 바탕으로 보건의료인적 자원의 수급 산정이 돼야 한다.
그리고 의료를 실제로 공급하는 전문직과 하부구조의 참여와 동의도 필요하다. 보건의료정책은 고도의 협치가 필요한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사안인데 정치가의 득표를 위해 화려한 수사와 현란한 구호로 대중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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