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욕망이라는 이름의 직업

의사, 욕망이라는 이름의 직업

  • 김이연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 겸 대변인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3.06.12 06:00
  • 댓글 6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협신문
ⓒ의협신문
김이연 의협 홍보이사 겸 대변인 ⓒ의협신문
김이연 의협 홍보이사 겸 대변인 ⓒ의협신문

대한의사협회에 몸담은 1년의 소회는 간호법과 관련한 절실한 투쟁의 과정과 그 결과가 되지 않을까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보건복지의료계에 드리웠던 상흔이 아물기 전에, 협회는 두 가지 현안의 압박을 거세게 받고 있었다. 단체장들이 단식하고 있는 절명의 순간에도 '의대 정원'을 논의하자는 제안을 받는 비인간적 현상을 보며 느낀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은 차라리 한편의 부조리극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비대면 진료 중개라고 하는 영리 목적의 산업계의 공세는 잠시 차치하였을 때, 이 시점 가장 강력하게 의료계에 주문되고 있는 사안은 '의대 정원'의 문제다. 정확히는 의대 정원 확대를 기정사실화 한, '의대 증원 규모'로 논의를 고착화하려는 시도는 노골적이다.

한국의료 위기 원인 분석 큰 격차

이에 대한 근거가 '응급실 뺑뺑이'로 표현되는 현상이라는 것은 의료를 이해하는 관점에 크나큰 격차를 드러낸다. 환자가 응급실에 진입하지 못해 사망했다는 표제의 기사를 보고 우리 국민은 '의사, 또는 병원들이 환자를 거부했다'고 느낀다. 반면, 동일한 기사를 접한 의사들은 즉시, '응급의료 시스템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음'을 체감한다. 이러한 격차는 왜 발생하며, 어떤 관점이 진실일까?

이에 대한 보도와 취재분석을 살펴보자. 가장 먼저 언급한 매체들은 '병상이 없었다'고 적었다. 이 발언은 구급차를 타고 의료기관을 전전한 환자와 이송하는 측이 병원으로부터 실제 구어적으로 듣는 표현이다. "우리 병원이 지금 귀 환자를 치료할 형편이 안 된다"는 의사 전달을 통상 병원과 의료진은 "베드(병상)가 없어서 어렵다"고 말한다. 

'베드'에 함축된 것은 '환자를 치료할 총체적 여력'을 포괄하는 언어다. 여기서 말하는 베드에는 다음과 같은 구성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환자가 입원할 중환자 병실, 그 환자를 수술 또는 시술할 고도로 숙련된 의사, 그 환자를 24시간 끊임없이 집중 치료할 주치의와 집중 간호할 간호사 등의 의료진. 

이후에 같은 환자의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는 불현듯 혼탁한 양상을 띈다. '응급실 의료진이 없었다', '수술이 가능한 의사가 없었다'. 이러한 보도에는 으레 '의사가 부족하다. 그러니, 의대정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클리셰가 적용된다. OECD 인구당 의사 수 인용도 빠지면 섭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현장 취재를 하여 사후 확인한 것과 같이, 70대 노인의 응급상황에서 반경 30km내 가용한 병상과 의료진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당장 내후년에 선발한 의대생들이 실제 응급의학과나 필수의료에 해당하는 영역의 전문의로 활동하려면 최소 십수 년을 투자해야 하는 상황에서,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식의 접근이 왜 지금 절대적인 1순위 정답처럼 따라붙는 것일까?

'숫자'가 말하는 욕망

그것은 의사라는 직업에 덧씌워진 한국사회의 욕망에서 온다. 의대를 진학하기 위한 초등학생부터의 사교육이 과열이라는 병리적인 현상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의사가 '인간사 이래의 특정한 기능을 하는 역할''이 아니라,  단지 '돈을 많이 버는 신분'으로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의미다. 

'의사=고소득자=세습이 아니고도 될 수 있는 부자'이기에, 현장의 종사자로서 의사들이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목놓아 외쳐왔어도, 사회의 어떠한 귀들은 그것을 마치 자격 없는 자들의 방백인 것처럼 못들은 척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일부 학부모들이 의사라는 직업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한국 의사의 업무 강도와 삶의 질은 어떤지,  평생 어떠한 내적 갈등을 극복하며 살아가는지 모르거나 피상적으로만 접한 채로도 10세  남짓인 자녀에게 의사가 되라고 강권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이 행복의 최우선 조건(퓨리서치, 2021)이라고 답하는 우리 사회의 현세적 관점에 거대자본화된 교육시장은 의사야말로 정년 없이 안정적인 직장의 이상향이며,  결혼시장의 이상형이라고 IMF 이래 한국사회는 세뇌하듯 대중을 학습시켜왔다. 

그래서 어떤 공무원은 인간이자 국민의 한 사람인 의사를 '공공의 재화'라고 말함에 거리낌이 없었고, 어떤 의대교수는 '의사들이 이기적이고 돈만 안다'고 공공연히 언론과 국회와 정부에 전문가를 자처하며 모욕과 괴롭힘에 해당하는 수사를 남발한다.  이들은 의사가 결국 '언제나, 평생, 기쁘거나 슬프거나 환자의 곁에 있는 실존하는 인간'이며 '행복하고 건강할 당연한 권리가 있는 현대 시민'임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듯이 행동한다.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 진료의 붕괴' 현상은 불합리한 의료체계의 온갖 모순과 위험요인들을 의사 개인과 개별 의료기관에 전가함으로써 버틸 수 있는 효용한계를 벗어났다는 명백한 신호다. 의료계는 앞으로도 이러한 사건들이 더 자주, 지속적으로 벌어질 것이라 예측했다. [사진=김선경기자] ⓒ의협신문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 진료의 붕괴' 현상은 불합리한 의료체계의 온갖 모순과 위험요인들을 의사 개인과 개별 의료기관에 전가함으로써 버틸 수 있는 효용한계를 벗어났다는 명백한 신호다. 의료계는 앞으로도 이러한 사건들이 더 자주, 지속적으로 벌어질 것이라 예측했다. [사진=김선경기자] ⓒ의협신문

역설적 의사상(像)의 불편한 동거

이 의도적인 망각, 인지편향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미혹한 단계의 하나의 직종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2020년 이를 의사혐오라 게시한 바 있다. 사회적 혹은 집단적 혐오(hate propaganda)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한국의 경제와 인구규모에 비해 과장된 메디컬드라마 시장은 의사 직역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와 숭배감을 끝없이 증폭시킨다.  극도로 이상적인 인본주의 범벅의 성직자적 의사상은 현실에서는 돈 버는 데 혈안이며 범죄도 서슴지 않는 의사들이라는 불쾌한 의사상과 역설적으로 동거한다. 

'우리(국민)의 기대는 이렇게 높은데, 너희(국민인지 관심 없으며 아마도 국민의 반대 측에 있는 의사)는 이렇게밖에 못하고 있다'라는 폄훼적 인식은 자극적인 범죄의사에 대한 보도들로 강화된다. 극소수의 범죄자들을 전파하는 만큼의 정성으로 일상적으로 생명을 살리고 있는 의사들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성녀와 마녀만이 존재하는 여성성은 현실이 아닌 것과 같이, 성인과 범죄자만 존재하는 의사상도 현실이 아니다. 한국의료의 끝간 데 없는 효율성과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의료수준은, 전국의 영재와 수재들을 그러모아 자기학대적이며 착취적인 근로환경을 버티게 한 내재적인 역량의 마지막 결과물이다. 여기서 마지막이라 함은, 이제 그러한 극강의 가성비 의료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한 초기 징후가 '응급실 뺑뺑이'이며, '소아 진료의 붕괴'라는 지점에 있다. 이 현상들은 불합리한 의료체계의 온갖 모순과 위험요인들을 의사 개인과 개별 의료기관에 전가함으로써 버틸 수 있는 효용한계를 벗어났다는 명백한 사인이기에 의료계는 앞으로도 이러한 사건들이 더 자주, 지속적으로 벌어질 것이라 불행히도 예측한 바 있다.

가십이 된 의사 수, 의사의 연봉

의사에게서 보려는 것이 돈이기에, 의사의 연봉은 기사화의 가치를 지닌다. 한국의 어떤 직업이 이렇게 꾸준하고 치밀하게 그 수입이 대중적 관심사이며 논의주제였을까? 이 정도로 적나라하게 회자되는 경우는 국제적 기량의 스포츠 스타의 연봉 정도다. 그들의 연봉은 국위선양의 의미로 해석되며 국민의 자부심이 된다. 보다 명확하게 공공의 기능을 하는 고위공무원인 국회의원의 연봉과 인원수를 아는 국민은 얼마나 될 것이며, 이에 대해 의사만큼 자주, 집요하게 기사화되었던가?

의사로서 다음의 상황에 지극한 슬픔을 느껴왔다. 메디컬드라마를 촬영하는 연기자는 해당 역할이 즐겁고 명예롭다고 느끼며, 연이은 시즌에 지속해서 출연하고 싶어한다. 실제로 보건의료와 관련된 혹은 지적인 이미지를 배경으로 수억 원대 상업광고를 계약하며 이후에도 상한가 역할의 배역을 꾸준히 맡게 된다. 

반면, 실제로 환자의 심장과 뇌에, 메스를 대고 혈관과 장기를 꿰매고 있는 현장의 의사들은 자신들의 현장을 즐겁고 명예롭다고 느끼기 어려워져 급속히 투신해온 영역을 포기하고 있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의업을 하는데 극심한 회의감을 느끼며 몸과 마음의 건강, 생계와 타협한다. 수억 원대 연봉을 받았다가는 불온한 시선을 받는다. 

촌각을 다투는 뇌혈관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환자의 생사 여부는 뇌수술이 가능한 전문의가 있느냐 없느냐다. 의사를 폄훼하는 집단적 혐오(hate propaganda) 인식 속에 본질과 가치를 부정하고, 의료행위의 형벌화를 통해 면허를 박탈하려는 법과 제도로 인해 필수의료를 지원하지 않거나 현장을 떠나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사진은 칼럼과 관련 없음. [사진=김선경 기자] ⓒ의협신문
촌각을 다투는 뇌혈관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환자의 생사 여부는 뇌수술이 가능한 전문의가 있느냐 없느냐다. 의사를 폄훼하는 집단적 혐오(hate propaganda) 인식 속에 본질과 가치를 부정하고, 의료행위의 형벌화를 통해 면허를 박탈하려는 법과 제도로 인해 필수의료를 지원하지 않거나 현장을 떠나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사진은 칼럼과 관련 없음. [사진=김선경 기자] ⓒ의협신문

신분으로 왜곡된 기능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연 의사라는 직업은 도대체 무엇일까? 의사에게 지불되는 사회적 비용은 어떤 직업보다도 부당하며, 근거가 부족한가? 의사의 존재는 돈 이외에 평가될 가치가 없는가? 우리의 의료체계는 의사로 표상되는 의료의 본질을 어떠한 철학으로 정립하고 있는가? 의사의 수를 늘리면 그들의 수입이 줄어들며, 따라서 자연히 열악한 근무요건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가설은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작동하는가? 그렇다면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의사들이 우리의 건강과 생명에 최선을 다할 것인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면 지금처럼 감옥에 보내고 면허를 박탈하겠다고 겁박하면 될까? 

의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꿈을 꾼다. 의사의 사회적 기능은 욕망의 전차에서 내려와야 한다. 이들을 물질주의의 산하에 두지 말고 고유하고 항구적인 역할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돈벌이와 소송전이 본체가 된 삶을 살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한다. 

이들을 살진 고기와 같이, 욕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한 점씩 살점을 뜯어내 피를 흘리고 다녀도 될 대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들을 선하고 유익한 존재로 길러 내고, 꾸준히 격려하고, 신뢰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를 위한 사회적 분위기와 의료환경을 반드시 구현하여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의사들로부터 진료를 받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