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하늘이 독자들께 전달되기를 바라며

맑은 하늘이 독자들께 전달되기를 바라며

  • 김연종 한국의사시인회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3.06.14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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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사시인회 제11집 '바람의 이름으로' 출간
광주·담양 일원 문학기행…"시는 안식이며 치유자"

김연종 한국의사시인회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김연종 한국의사시인회장
김연종 한국의사시인회장

지난 세월을 되돌아 봅니다. 이석증, 실어증, 기억상실증….

슬픔이 지나갈 때마다 몸이 말개졌습니다.

역병의 긴 터널을 가까스로 빠져나왔지만, 고통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희망의 불씨가 사라져버린 세상에 어리석은 믿음을 굳게 간직한 동지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시(詩)가 마음의 안식이 되고 병든 몸을 치유하리라는, 그래서 노래가 되고 춤이 되고 메스가 되어 마침내 희망을 줄 거라는.

모종의 결심을 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모종의 실마리가 풀리기를 바라면서 열한 번 째 자리를 펼쳤습니다. 모쪼록 초심을 향한 맑은 하늘이 독자들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의사시인회 제11시집 <바람의 이름으로>가 출간됐다. 이번 시집에는 스무 명의 회원들이 참여했고, 마종기 시인과 이원로 시인은 초대시로 빛내 주었다. 모두 진료하면서 시를 쓰는 현역 의사들이라 바쁜 시간을 쪼개 시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짐작이 간다. 사화집을 엮을 때마다 마감 시한을 연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시에 첨부한 '시인의 말'을 통해 그 심정을 잠시 엿본다.

"점점 눌변이 되어간다. 이러다 나는 말을 잃어버릴 것 같다. 그게 그것 같은 어설픈 분별들, 명색(名色). 언어라는 옷을 입고 참 위태롭게 서있다." 가까스로 마감 시한을 지킨 김승기 시인도 실어증을 경험했던 것 같다.

"시험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데 힘든 시험을 치러야 하는 막막함, 지금까지도 이런 악몽을 자주 꾼다. 가야 할 길이 아득하구나." 2014년 강릉으로 귀환하여 솔빛 안과를 운영하는 정의홍 시인도 진료와 시작의 난감함을 토로하고 있다.

"유성의 이팝나무는 봄마다 운다. 구경꾼은 새들과 햇살, 체한 봄이 잠시 의자에 기대본다." 정신과 개원의로 일하고 있는 박권수 시인은 애틋한 심정으로 봄을 맞이한다.

"우리는 기도할 뿐이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기를 어리석고 못난 날은 지나고 꽃들의 상처를 만져본다. 저녁에 꺾인 꽃, 시가 되어 피어나리." 진한 서정을 노래하는 서화 시인은 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시의 탄생을 갈망하고 있다.

"평생 걷던 길에서 벗어나 수시로 일탈을 꿈꾸었으나 돌아보니 매양 같은 길 부끄러움만이 온통 나의 몫 꽃은 언제나 피려는지, 피긴 하려는지." 신입 회원으로 처음 자리를 같이한 손경선 시인은 삶의 덧없음을 돌아본다.

"가뭄 끝 단비는 꽃비가 되고 아직은 벗지 못한 마스크로 사화집을 정리하는 4월의 츄파춥스" 소아청소년과 의사인 송명숙 시인도 만화방창의 꽃구경 대신 4월의 츄파춥스를 선택했으리라.


이번 사화집의 표제작인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이름으로'는 60여 년 전 쫓겨나다시피 고국을 떠나야 했던 저간의 사정과 고국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심정을 아들에게 전하고 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들은 아비의 속 사정을 정확히 알지는 못할 터.

미국에서 안과 의사로 성공한 아들은 대한안과학회 초청으로 '각막 이식의 새 수술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외국인 학자로 강연 준비에 바쁜데, 강연 중엔 아버지를 농담으로 언급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을 한다.

"가거든 가슴 펴고 아버지 나라를 즐겨라./ 그곳에는 좋은 바람이 많이 분 다더라./ 새로 피어나는 고운 꽃도 많이 만나라." 바람의 이름으로 하는 부탁이지만 실은 시인의 내심이자 바람이리라.

한국의사시인회가 열한 번 째 사화집 '바람의 이름으로'를 상재했다. 의사시인회는  6월 10∼11일 이틀간 광주 담양 일원에서 문학기행을 겸한 출간기념식을 가졌다.
한국의사시인회가 열한 번 째 사화집 '바람의 이름으로'를 상재했다. 의사시인회는 6월 10∼11일 이틀간 광주 담양 일원에서 문학기행을 겸한 출간기념식을 가졌다.

이번 출간 모임은 6월 10∼11일 이틀간 광주·담양 일원에서 문학 기행을 겸한 행사로 진행됐다. 맑은 하늘과 싱그러운 바람을 향해 일찌감치 서울을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남녘 땅에는 좋은 바람이 많이 불었고, 고운 꽃도 많이 피어 있었다.

"초여름 오전 호남선 열차를 타고/ 창밖으로 마흔 두 개의 초록을 만난다./ 둥근 초록, 단단한 초록, 퍼져 있는 초록 사이./ 얼굴 작은 초록,/ 초록 아닌 것 같은 초록,/ (중락) 한참 부풀어 오른 땅이 눈이 부셔 옷을 벗는다./ 정읍까지는 몇 정거장이나 더 남은 것일까."

초여름 오후 호남선 SRT를 타고 정읍을 지날 무렵 문득 그의 시 '마흔두 개의 초록'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만다.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광주는 내게 오롯이 초록으로 남아 있다. 내가 나고 자라고 학교에 다녔던 곳, 학창시절 지치고 힘들 때마다 나를 품어 주었던 곳, 내 청춘의 사랑과 좌절을 온전히 지켜보았던 곳, 여전히 부모님이 잠들어 계신 망월동 제8 묘역까지. 시대는 변했지만 무등산 자락은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담양의 조아당 펜션에서 진행된 출간기념회는 그야말로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식순에 따라 인사말을 나누었고 몇몇 시인의 건배사와 <문학청춘> 김영탁 주간의 축사, 그리고 시 낭송이 이어졌다. 한국의사시인회 10년의 고락을 가감 없이 나눌 수 있는 고즈넉한 시간이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여흥에도 의사로서의 고충과 시인으로서 고뇌가 적당히 섞여 맥주 거품처럼 피어올랐지만, 시끌벅적하거나 번잡하지는 않았다.

맑은 하늘과 상쾌한 공기 때문인지 숙취에도 이른 시간에 눈을 떠 죽녹원 산책에 나선다. 관방천변에서 소박하지만 맛깔나는 남도의 백반으로 지친 속을 달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운정동 518 국립묘지에서 민주 영령들께 헌화 분향하고, 문병란 시인과 이호철 소설가, 구묘역에 잠들어 있는 김남주 시인 등 선배 문인들의 묘소를 찾아 묵념했다. 이어 들른 소쇄원에서 문화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시대를 불문하고 시를 쓰고 문학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번 여정에 김완 시인의 도움이 컸다. 한국의사시인회 회장을 지냈고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한 그는 현재 '광주 평화포럼'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배려 깊은 안내에 따라 우리는 패키지 여행객처럼 넋을 놓고 따라다니며 감탄사를 연발할 뿐이다.

광주 담양에서 1박2일로 진행된 '바람의 이름으로' 출간 기념회는 바람처럼 지나간 조촐한 행사였지만, 의업을 받들며 문학을 사랑하는 동지들에겐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열한 번 째 사화집 <바람의 이름으로>가 한국의사시인회 역사 속 한 페이지로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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