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항공우주의학협회장 김규성 인하대학교 교수
머지않아 "우주 대항해시대"에 도달할 것, 미리 미리 대비해야
우주인 양성에 우주의학 필수...우리나라 과도기 상태 분발해야
대항해시대, 대서양의 범선은 의학적으로 최악의 공간이었다. 신선한 식품을 저장할 수 없었고, 선원들은 거칠었다. 좁은 배에서 수 개월을 머물러야 했다. 결과적으로 항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부(富)라는 세이렌의 유혹을 뿌리칠 순 없었다. 선원들은 계속 대서양으로 나아갔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질병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선원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병이 있었다. 괴혈병(Scurvy)이라는 이 질병의 정체가 밝혀지기까진 무려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허무하게도, 괴혈병의 치료는 비타민 C가 풍부한 라임 주스 한 잔이면 충분했다.
괴혈병은 이제 '역사'다. 자취생들이 레토르트 식품만 먹다가 괴혈병에 걸린다는 소식이 뉴스에 보이곤 하지만 그래도 비타민제 한 알이면 손쉽게 병을 정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괴혈병이 이따금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병을 정복하는 과정이 황당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환경을 개척하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의학적 문제에 맞닥뜨린다"라는 교훈을 인류가 얻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이 21세기에 일어나려고 한다. 새로운 바다를 개척하는 선원들 사이에서 다른 '육지인'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의학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는 정복한 지 오래인데, 새로운 바다는 도대체 무엇일까?
매일매일 새로운 과학과 기술이 쏟아지는 현대사회에 접어들었음에도 그 누구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는 바다가 있다. 이 바다를 자국의 마당으로 만들기 위해 냉전 시대에는 두 초강대국이 맞붙었다. 세기가 바뀐 지금에서야 호기심 가득한 대부호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항해를 떠난다. '새로운 바다'는 바로 우주다.
우주인들이 먹을 비타민이 없어 괴혈병에 걸리는 일은 없지만, 대기권 바깥의 환경은 평생을 지구 표면에서 살아온 인간에겐 가혹한 환경임이 틀림없다. 김규성 교수는 우주에 나간 인간이 가장 위협받는 세 가지 기관을 1. 전정계 2. 심혈관계 3. 근골격계로 골랐다. 그중에서도 전정기관과 관련 있는 평형의학을 전공한 그는 레지던트 때 우주의학에 관심을 가졌다.
Q. 어떻게 우주의학을 접하게 되셨나요?
처음에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죠, 군대 생활을 할 때 항공우주의학회가 처음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학회지를 봤던 것이 첫 인연이었습니다. 그 후 비행군의관 훈련을 받았고, 이비인후과 수련을 마치고 나선 평형의학을 계속 공부했습니다. 우주로 사람을 보내는 시기가 도래한 뒤로 우주 멀미는 우주 탐사 분야에 있어서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거든요. 우주의학을 접한 뒤로는 지금까지 계속 관련 분야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김규성 교수는 그 뒤로 우주의학자의 길을 착실히 밟아왔다. 9월 14일부터 16일까지 그는 한미 협력 연구 사업으로 심우주(Deep space, 달 밖의 우주)에서의 뇌 인지 기능의 변화를 연구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김규성 교수는 자신이 '우주의학 1세대'라고 말하진 못하겠다고 밝혔다.
Q. 우주의학 1세대가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나는 우리나라 우주의학의 1세대가 아니에요. 우주의학 1세대라고 자칭하려면 의사가 된 뒤로 우주의학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해외 우주 선도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우주의학 학위나 전공자를 찾기 어렵습니다. 누군가 자기 일생을 우주의학에 헌신하겠다고 한다면 그 연구자가 우주의학 1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규성 교수는 그의 커리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평형의학 연구자이고, 항공과 우주에 대한 폭넓은 의학 연구를 진행했다. 인터뷰의 주제는 좀 더 넓은 범위로 옮겨갔다.
Q. '우주'와 '항공'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실 물리적으로는 연속된 스펙트럼이에요. 우주 안에도 미세중력, 미세대기가 있는 우주가 있고 그것조차 없는 우주도 있습니다. 따라서 항공과 우주는 인간이 임의로 나눈 영역입니다. 항공은 우리가 어느 정도 익숙해 있고 이미 알 만큼 아는 공간입니다. 또 가장 중요한 점은,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충격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서양 너머를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으로 불렸던 것처럼, 그러나 우주는 아직 미지의 영역입니다.
Q. 의학에 있어서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우주와 항공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얼마나 아느냐의 차이입니다. 항공이라는 공간은 인간을 위한 모든 보호 장치가 개발되어 있습니다. 비행기는 충분한 산소가 공급되고 고막이 터지는 일도 없게 완벽하죠. 우주는 그런 보호 장치가 없습니다. 저궤도야 지구자기장에 의한 방사선 차폐가 있고, 또 그동안의 희생과 도전으로 많은 데이터가 쌓였습니다. 그러한 데이터를 구체적으로 활용한 공간이 바로 국제우주정거장(ISS)이죠. 그런데 심우주는 인간이 나갔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이 힘듭니다. 아직 데이터가 너무 적거든요.
Q. 구체적으로 우주에선 인체에 어떤 어려움이 있나요?
첫 번째로 제가 연구하는 평형의학과 관련된 전정기관들이 있고요, 두 번째로는 심혈관계, 그다음에 근골격계 이 세 가지 분야가 가장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무중력은 지구로 착륙하고 나면 조종사가 잘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크게 골격근을 손상시킵니다. 또 체액의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신체 윗부분으로 쏠리게 됩니다. 뇌도 관련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요. 지금까지 태어나서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던 전정계가 멈췄을 때 생기는 '공간 인식 혼란'들도 발생합니다. 여기에 면역, 정신의학 등 셀 수 없이 많은 요소와 현상이 신체에 관여하기 때문에 우주의학은 특정 진료과가 아니라 모든 과가 연관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관 STEAM 사업에 선정된 우주 재생 의학 연구 또한 이러한 다학제적인 관심 속에서 피어난 기념비적인 사례다. 인류가 우주를 정복하기 위해선 유인 우주 탐사가 필수적이다. 인간과 의학을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우주인 양성을 위해선 우주의학의 발전이 필연적이다. 한국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왔을까, 김규성 교수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하다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Q. 누리호나 스페이스 X에 대한 뉴스가 매일 오르내리는 요즘, 우주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하고 있습니다. 의료계의 시선은 어떨지 궁금한데요.
맞습니다. 우주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관심들이 식지 않고 유의미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진 모르겠습니다. 미국을 포함해서 일본, 유럽, 러시아는 국제우주정거장을 10년 이상 운영한 경험이 있고,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우주를 개척하고자 추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뉴 스페이스 시대(New Space era, 정부의 우주 정책이나 자금지원과는 별도로 기업이 자기 자본을 갖고 새로운 우주 비즈니스를 하는 시대)' 까지 도달했다고 평가받고 있어요. 그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우주라는 공간을 '활용 가능한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더 이상 우주의학이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닌 게 되는 거죠. 공간의 개념적 인식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단계는 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Q. 그렇다면 한국은 과도기에 있다고 보시나요?
우리나라 국력에 비하면 늦었죠. 그렇지만 우리도 미국의 심우주 탐사 계획인 아르테미스 계획에 참여하고 누리호 발사에 성공하는 등 국민들께 좋은 뉴스를 계속 내보이고 있어요. 이제는 우주 기초과학, 우주 외교, 우주의학에도 관심에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정부가 발표한 4차 우주 개발 진흥계획이 작년 말에 발표되면서 우주 기초과학, 유인 우주 활동이 대한민국 우주 개발 계획에 명문화되었다. 아직 구체적인 하위법과 계획이 본격적인 추진력을 얻진 않았지만, 발사체나 위성 사업에 치중되어 있던 한국의 우주 개발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Q. 과도기에 접어든 우리나라의 우주 개발 전략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나라의 우주 발전을 생각한다고 하면 미국, 러시아 같은 우주 선도국이 60년대부터 해왔던 것을 정석적으로 따라갈 수는 없어요. 그 간극을 빠르게 메꾸려면 협력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협력 연구를 위해서는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세계에 대한민국이 갖는 역량을 충분히 알려야 해요. 우주라는 환경에 적응하는 주체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국가입니다. 지금부터 핵심 기술을 차근차근 쌓아 나아가야 합니다.
Q. 의대생과 의사가 우주의학을 연구하고 싶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요?
우주의학은 크게 둘로 나눠볼 수 있어요. 우주 환경에 대응하는 의사와 우주 환경을 활용하는 의사가 그것입니다. 면역 이상, 당뇨를 관리하고 고립감 때문에 정신이 붕괴하는 것을 막아주는 의사는 활용보단 대응에 집중하는 의사입니다. 우주 공간의 특성을 이용하여 제약 개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의사는 활용의 예시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은 2~3년 규모의 우주의학 전공의 수련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비교하자면 가정의학과와 가장 유사한데, 신체 검진을 포함한 다양하고 독특한 과정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와 같은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에 수련을 마치고 연구소에서 근무하거나 해외 학위를 취득하여 역량을 기를 수 있습니다. 임상 경험, 그중에서도 내과나 가정의학과와 같은 포괄적인 범위의 진료과를 선택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김규성 교수의 목표는 단기간에 한국의 우주의학 수준을 우주 선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가능성이 있냐는 질문엔 "충분하죠"라는 대답으로 자신감을 보였다. 그의 표정에서 한층 당당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인류 역사에서 바다를 정복한 세월은 500년이 되지 않는다. 그 위험한 곳에 빠져 죽고 굶어 죽는 희생으로 인류는 바다를 정복했다. 중요한 것은, 바다를 지배한 국가는 바다'만' 지배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항해시대를 호령한 초강대국, 혹은 열강이라고 불렸던 국가들은 구대륙과 신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물리적 영토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김규성 교수는 우주에 대항해시대가 펼쳐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역설한다.
Q. 우주의학을 연구하면서 느꼈던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
조롱도 있었습니다. 우주 중력 변화가 면역을 올린다는 데이터를 보고 "알레르기 치료법으로 우주 유영을 추천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받았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환경의 문제인 거죠. '우주 그거 몇 명이나 간다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우주에 가냐'라는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있으니까요. 우리가 우주에 가는 이유는 새로운 미래를 찾고 기술 역량을 증진하기 위함도 있지만 다가오는 우주 시대에 우리나라의 주도권을 공고히 함도 있어요. 신대륙을 향해 도전한 국가가 세계에서 목소리를 내는 시대가 왔었듯이.
더 이상 대한민국은 국제무대에서 침묵하는 국가가 아니다. 대항해시대가 우주를 배경으로 다시 돌아온다. 새로운 괴혈병에 대비하기보다 더 넓은 실험실에 눈 돌려야 할 지금, 우리나라 우주의학계의 돛을 올릴 '콜럼버스'는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