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대로에 전국 의사 운집…유모차 끌고 연인 손잡고 삼삼오오
의약분업 선봉 김광명 단장도 참석 눈길 "한 사람이라도 돕겠다"
'의대정원 X', '원점 재검토'라고 쓰인 검정 마스크를 쓰고 '의대정원 확대추진 의료체계 위협한다'라고 적혀 있는 빨간 띠를 둘렀다. 유모차를 끌고, 부부는 손을 잡고 여의대로를 찾은 약 4만명(대한의사협회 추산, 경찰 추산 1만명)의 국민은 모두 의사다.
이들은 진료실이 아닌 거리로 피켓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소신있는 응급진료 형사처벌 왠말이냐', '무분별한 의대증원 양질의료 붕괴된다', '준비안된 필수정책 의료체계 종말이다'라고 외쳤다.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는 3일 서울 여의도 일대에서 '의대정원 증원 및 필수의료 패키지 저지를 위한 전국의사 총궐기대회'를 열었다.
지난 1일을 기점으로 정부가 병원을 떠난 전공의에게 본격적인 행정처분을 예고한데다 경찰이 대한의사협회와 전현직 임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하면서 의사들의 반대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 컸다.
궐기대회에 참석한 의사들은 행사가 진행된 약 한 시간 30분 내내 서서 정부의 일방적 정책을 비판하는 '리더'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박수를 쳤고, 함성을 보냈다.
김택우 의협 비상대책위원장은 "정부는 대화를 말하면서 정원 조정은 불가하다는 정부의 이중성과 28차례 정책 협의 사실을 주장하다 느닷없이 대표성을 문제 삼고 있다"라며 "말 그대로 의사를 우롱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의료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국민 불편과 불안을 조속하게 해결하길 원한다면 전공의를 포함한 비대위와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정근 의협 회장 직무대행도 "정부는 의사 인력 배분 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 없이 2000명의 의대정원 증원만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잘못된 의지를 보이고 있다"라며 "의료계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현재 비민주적인 정부 태도를 바라만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성민 의협 대의원회 의장은 국민에 호소했다. 그는 "국민여러분도 젊은 전공의가 천직으로 여겨왔던 의업을 포기하고 학생들은 그토록 원하는 의사가 되기 위한 학업을 왜 포기하려는지 한번만이라도 귀 기울여 달라"고 했다. 정부를 향해서는 "진정성을 갖고 조건 없는 대화의 장을 열어 소통해 주길 바란다"라고 호소했다.
직역을 대표해 현 상황을 개탄하는 연대사도 이어졌다.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은 "후배 의료인이자 제자인 전공의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외쳐 박수를 받았다.
홍순원 대한여자의사회 차기 회장은 "현재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게 아니라 질병의 예방, 치료, 관리에서 더 높은 전문성과 효율성을 갖춘 의료인력을 양성하는 것"이라며 "의료계 다른 조직과 힘을 모아 정부와 대화의 창을 열고 의료 교육 및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동석 대한개원의협의회장 역시 '국민' 중 한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그동안 의료계는 필수의료를 살릴 수 있는 대책을 여러차례 요구했지만 정부는 무시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의사를 왕창 늘린다고 필수의료가 살아나겠나. 정부가 발표해야 할 정책은 의대증원이 아니라 원가 이하의 수가를 정상화하고 고의과실이 아닌 의료사고 처리 특례법이며 제대로 된 의료전달체계"라고 덧붙였다.
궐기대회 현장에는 의대생, 전공의도 곳곳에 자리했으며 2000년 의약분업 당시의 주역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2000년 의약분업 때 100인 교수단을 이끌었던 김광명 단장은 "한 사람이라도 돕겠다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다"라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들이 힘을 합하고 있다. 준비가 하나도 안된 상황에서 정부가 정책을 강행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말했다.
자신을 낙수과 전공의라고 소개한 한 전공의는 같은 의사인 연인과 함께 궐기대회 현장을 찾았다. 이들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나왔다"라며 "현재 정부 정책으로는 미래를 도무지 그릴 수 없다. 전문과목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호소했다.
충청남도 논산에서 상경한 한 개원의는 "개원의는 의대정원 확대와 큰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후배 전공의, 개원의 모두 같이 살아가는 동료"라며 "의대정원뿐 아니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도 문제가 너무 많다. 그 중 가장 심각한 문제인 의대정원을 저지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전했다.
의료계의 현 상황을 해외에 알리기 위한 영어 푯말, 현수막도 등장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은 'We are not criminals(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펼쳐들었다. 여의도 공원 한켠에는 외신과 외국인이 볼 수 있도록 현 상황을 영어로 담은 플랜카드를 펼쳐뒀다.
한 개원의는 저항의 상징으로 꼽히는 가이 포크스(영화 브이 포 벤데타 중 브이가 쓴 가면)가면을 쓰고 '정부가 필수의료 의사를 내쫓았고, 이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팻말을 들고 활보했다. '의새(의사와 새의 합성어, 의사를 비하한 표현)' 가면도 등장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의 의사를 '의새'로 잘못 발음하면서 해당 단어가 밈(meme, 인터넷 유행 콘텐츠)처럼 퍼졌다. 이를 풍자해 새 가면을 쓰고 궐기대회 현장에 참석한 의사도 있었다.
대한의사협회 선거에 출마한 후보이자 비대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명하 조직위원장, 박인숙 대외협력위원장, 임현택 비대위원은 함께 결의문을 낭독했다.
▲의료비 폭증을 불러올 수 있는 의대정원 증원 문제 원점에서 재논의 ▲의대교육의 질 저하와 의학교육 부실화를 초래할 수 있는 의대정원 2000명 증원 졸속 추진 즉각 중단 ▲의사 진료권 과도하게 제약하고 국민의 자유로운 의료선택권을 침해하는 불합리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추진 즉각 중단을 요구했다.
총궐기대회는 의대정원 증원 철폐,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철폐를 형상화한 현수막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위헌적인 명령과 의료진 고발 중단', '국민부담 증가하는 의료개악 반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철폐'라고 쓰인 현수막을 읽은 4만 의사들은 소음 기준치인 90dB에 육박하는 함성으로 정부 정책에 분노를 표시했다.
14만 의사들은 "의대정원 증원 이슈가 4.10 총선 등 정치일정에 따른 정쟁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라며 "의대정원 증원 문제는 정치와 정쟁의 대상이 아닌 의료시스템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존망이 걸린 중대 사안임을 정부는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