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창대했으나…5차 모집도 실패 "휴일·야간 진료 부담인데 입지마저 심각"
수익 조사 부실 지적, "민관 '협력'이라면서…공공 의무도 다하고 책임도 다 지고"
개원의 모르는 조건 "열심히 일군 터전, 10년 뒤 남의 것 될 수 있다고? 누가 가나"
세금 47억원을 들인 민관협력의원이 1년 넘게 표류하고 있다. 까다로운 조건을 고수하면서, 개원의들의 수요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건물 먼저 짓고 본 탓이라는 평이다.
큰 규모의 혈세를 쓰는 사업인데도 예상 수익 산출 등 조사가 미흡했고, 사전에 의료계와 논의를 통한 성공 가능성 평가도 없이 강행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서귀포시는 지자체 예산 47억 4500만원을 들여 지난해 1월 연면적 270평에 달하는 '민관협력의원'을 지었다. 진료실 2곳과 처치실·방사선실·검진실·물리치료실·주사실 등을 갖췄고, 위·대장내시경, 초음파진단기 등 의료장비도 15종 46대 구입했다. 주차장은 64대 규모다.
야심찬 규모가 무색하게, 서귀포 민관협력의원은 5차례에 걸친 공모에도 공실로 남아있다. 1년여간 지원자 부재로 유찰을 거듭했고 지난 8일 5차 공모도 마찬가지였다.
민관협력의원은 의사를 고용해 급여를 주는 의료원 등 여타 공공의료기관과는 다르다. 건물과 시설을 입찰에 부쳐 대여해 주고 경영은 오롯이 의료진이 하는 구조다.
운영은 물론 고용, 홍보, 관리까지 민간 의료인의 몫이고 경영에 따른 수익도 손실도 경영책임도 모두 의사가 부담한다. 그러면서도 휴일·야간진료와 건강검진기관 지정 등 공공으로서 업무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휴일·야간 진료 등 의무 조건이 있는데도 '입지'조차 불안정한 것이 거듭된 유찰 원인 1순위로 손꼽힌다.
이승희 제주특별자치도의사회장은 "말도 안 되는 위치"라고 딱 잘라 말했다. 휴일·야간진료를 유지하려면 운영비와 인건비 증가를 감수해야 하는데도 위치상 수익성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승희 회장은 "해당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고 1~2km 거리에 다수 의원이 밀집한 번화가가 있다. 주민들이 가까운 곳을 놔두고 굳이 민관협력의원을 찾아갈지 의문"이라며 "무의촌도 아닌데 무리해 가면서까지 민관협력의원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꼬집었다.
민관협력의원의 모집 조건을 살펴보면 수익성 우려는 더욱 커진다.
지난해 2월 첫 입찰에서 서귀포시가 내건 조건은 ▲365일 밤 10시까지 야간·휴일 진료 ▲건강검진기관 지정 ▲내과·가정의학과·응급의학과 전문의 포함 2~3명 이상 진료팀 대상이었다.
이후 4차례 추가 공모를 진행하면서 조건을 단계적으로 완화했는데, 5차 공모에서 제시된 조건은 ▲평일 오후 8시·주말 오후 6시까지 진료(주중 1일 휴무 가능) ▲개원 후 휴일·야간진료 6개월 유예 ▲개원 후 건강검진기관 지정 1년 유예 ▲전문의 (1명 이상) 대상 등이다.
지자체는 민관협력의원의 수익성을 검토하고 47억원을 쓰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까.
민관협력의원 사업의 타당성 검토는 지난 2020년 6개월간 이뤄졌다. 사업의 주요 근거는 2018년도 해당 지역 인근 대정읍·안덕면 주민들의 야간·휴일 관외 의원 진료비 총액이 28억 1751만원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중증도나 진료과 구분이 없는 수치로 내과·가정의학과·응급의학과 전문의를 모집하던 첫 취지와는 괴리가 있다. 휴일·야간 인건비와 운영비, 주민 접근성과 인근 의료기관 등을 다각적으로 고려한 현실적인 수익 모델도 없었고, 구체적 예상 수익액이 부재한 것도 큰 걸림돌이 됐다.
개원의를 구하는 사업임에도 개원가와 소통이 없었다.
민관협력의원 사업 개시 때 제주도의사회 회장직을 맡았던 김용범 전 회장은 당시 "사업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완공된 후에야 의사를 연결시켜달라며 연락이 와 황당했다"고 전했다. "휴일·야간 진료가 필요했다면 차라리 해당 권역 민관의료기관과 협력하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의사회와 토론을 하든 간담회를 하든 자문을 구했다면 어땠을까"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민관협력'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의사 개인이 의무와 부담을 모두 짊어지는 구조란 지적도 나온다. 의료계에서는 응급진료와 관련한 의료사고 우려가 큰데, 관의 요구를 수용해 휴일·야간 응급환자를 받는데도 그에 따른 사고에 보호나 지원은 없는 상태다.
서귀포보건소에 문의하자 "민관협력의원이 처음 하는 사업이다 보니 의료사고 보호나 법적 지원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며 "사업 형식 자체가 조건을 이행하는 대신 임대료를 저렴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답했다. 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건물·시설 임대에서 그친다는 입장이다.
입찰을 결심하고 문의까지 했던 수도권의 A 개원의는 [의협신문]과 통화에서 "지금도 의원을 운영하면서 단순 복통 환자가 복막염으로 인한 패혈증인 경우 등 가슴 서늘한 순간이 왕왕 있다"며 "민관협력의원은 제주도의 남단이고 대학병원 응급실은 북단이라, 전원한다 하더라도 야간 응급환자를 받는 것에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이어 "휴일·야간 인력을 유지하라 하면서 인건비, 투자비 등 별도 지원도 없이 책임을 부담하라 하는 '민관협력' 구조가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10년 이상 재계약이 불가능한 점도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A개원의는 "건물과 시설을 임대료 2400만원(현재 2262만원)에 대여해 준단 말에 처음에는 해볼까 고민도 했다"고 운을 뗐다.
"의사는 한번 개원을 하면 은퇴까지 평생 터전이란 생각으로 일한다"고 짚은 A개원의는 "수도권에서 인프라가 부족한 제주로 이사가긴 어렵다는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5년 계약 연장이 한번 밖에 안된다는 조건 때문에 입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A개원의는 "뼈 빠지게 밤낮으로 일해서 단골도 늘리고 유명세를 키워놔도, 내가 일군 모든 것을 10년 후에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 있다면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의사 외에는 들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