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교수 늘려놓고 1년 만에 없던 일로? "증원 단발성 이벤트 아냐"
"세차례 의정합의 매번 휴지조각 취급, 이런 정부 약속 어떻게 믿겠나"
의료 비상사태 해결을 위한 여야의정협의체 구성 논의가 답보상태를 걷고 있다.
관건은 2025년 의대정원 재논의.
의료계는 정부의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촉발된 사건인만큼 2025년 의대증원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며, 정치권에서도 그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남은 것은 대통령실과 정부. 이들은 여야의정이 대화를 통해 사태해법을 모색하자면서도 "2025년도 의대증원은 변경할 수 없다"는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선 증원, 후 논의'는 의료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카드다.
수천에 달하는 대규모 의대증원은 의학교육 현장에 비가역적인 변화를 발생시킬 수 밖에 없는데다, 2014년과 2020년 의정협의 내용들이 이후 모두 휴지조각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그 신뢰성 또한 담보할 수 없는 탓이다.
대통령실·정부 "2026년 의대증원 재논의 가능...2025년은 안돼"
의료 비상사태 장기화로 비판여론이 커지면서 대통령실 기류 또한 일부 변화가 있었다.
대통령실은 '2025년은 물론 2026년 의대 증원도 이미 확정됐다'던 기존의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나, 지난 6일 "2026년 의대 정원 문제는 의료계가 합리적 안을 제시하면 언제든 제로베이스에서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의료계가 합리적인 안을 제시하면 언제든 검토하겠다던 기존의 주장을 재확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제로베이스'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대통령실과 정부는 2025년 정원 증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변경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입시현장 혼란 등을 이유로 들어서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12일 의대증원 관련 대국민담화에서 "2026년도부터는 의료계의 의견이 있다면 숫자에 구애받지 않고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다만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2025년도 의대정원 재논의에 대해서는 "(수시모집을 통해) 대학별로 이미 3:1, 4:1 정도의 경쟁률을 가질 정도로 지원이 이뤄졌다"면서 "2025년 모집요강은 바꾸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고 그대로 진행해야 한다"고 재차 거절의 뜻을 밝혔다.
대한의사협회를 중심으로 한 의료계는 13일 "정부가 불통을 멈추고 전향적인 변화를 보여야 한다"면서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는 현 시점에 여야의정 협의체 참여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냈다.
"정원 증원이 단발성 이벤트냐? 일단 늘리면 돌이킬 수 없어"
의료계는 2025년 증원부터 멈춰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한의사협회는 9일 입장문을 내어 "2025년을 포함해 모든 의대정원 증원을 취소하고, 현실적으로 논의가 가능한 2027년 의대 정원부터 투명하고 과학적 추계방식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시에 2000명에 가까운 학생을 증원하는 일은 '단발성 이벤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학교육 현장에 비가역적인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정부 발표대로라면 내년 의과대학 신입생 정원은 기존 3058명에 증원된 1509명을 합해 총 4567명. 여기에 올해 교육현장을 떠난 휴학생까지 합하면 그 수가 7500명에 이른다. 현원의 2.5배다.
의학교육 현장에서는 늘어난 학생 숫자에 맞춰 강의실과 실습실 등 시설부터, 교육을 담당할 교수까지 그에 맞춰 대폭 확대해야 한다. 2026년 이후 정원 재조정된다면 늘려놓은 시설과 인력 또한 그에 맞춰 다시 모두 줄여야 한다.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로, 만약 실현 된다하더라도 각 의과대학들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불필요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허대석 서울의대 명예교수는 "의과대학 입학 정원 확대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닌 한국의 미래 의료 체계를 좌우할 중대한 결정"이라면서 이라며 "수시로 변하는 학생 수를 고려해 교수 요원을 1년 단위로 채용했다 해고 했다를 반복할 수 없다. 의학교육의 본질을 무시한 정책은 오히려 한국 의료의 혼란과 불확실성을 키울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지난 10일 브리핑을 통해 대규모 증원에 따른 의학교육 질 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2030년까지 5조원을 들여 시설과 인력 확충 등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국립의대 전임교원을 2027년까지 3년간 1000명 증원한다는 계획도 재확인했다.
향후 증원 규모 조정으로 추가증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날 교육부는 "그때가서 잘 판단해서 대응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2026년 이후 증원 계획은 현재로서 '시계제로'. 재정투입 계획은 존재하지만 정책 청사진은 없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의정합의 매번 휴지조각 취급, 이런 정부 약속 누가 믿겠나"
같은 맥락에서 '2025년 증원'을 고수하는 대통실과 정부의 입장의 변화가 없는 한, 이후 증원 문제를 재논의하자는 정부의 약속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의료계의 판단이다.
과학적인 추계를 바탕으로 증원을 재논의하겠다는 말과 달리 추후 늘어난 시설·인력을 되돌릴 수 없다는 각 대학 민원 등의 사유로, 증원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의약분업 사태부터 2020년 9.4합의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이른바 의정합의 불이행 전력들도 이런 의심에 힘을 보탰다.
실제로 의대증원 관련 사항은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가 지난 2020년 체결한 9.4 의정합의에 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보건복지부는 의대정원 확대, 공공의대 신설 추진을 중단하고 코로나19 안정화 이후 의정협의체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한의사협회와 협의한다. 또한 의대정원 통보 등 일방적 정책 추진을 강행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다.
<보건복지부-대한의사협회 합의문>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국민의 건강과 보건의료제도의 발전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지역의료, 필수의료, 의학교육 및 전공의 수련체계의 발전과 코로나19 극복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 보건복지부는 의대정원 확대, 공공의대 신설 추진을 중단하고 코로나19 안정화 이후 의정협의체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한의사협회와 협의한다. 이 경우 대한의사협회와 더불어민주당의 정책협약에 따라 구성되는 국회 내 협의체의 논의 결과를 존중한다. 또한 의대정원 통보 등 일방적 정책 추진을 강행하지 않는다.
2.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지역수가 등 지역의료지원책 개발, 필수의료 육성 및 지원, 전공의 수련환경의 실질적 개선, 건정심 구조 개선 논의, 의료전달체계의 확립 등 주요 의료현안을 의제로 하는 의정협의체를 구성한다. 보건복지부는 협의체의 논의 결과를 보건의료발전계획에 적극 반영하고 실행한다.
3. 보건복지부와 의료계는 대한의사협회가 문제를 제기하는 4대 정책(의대증원, 공공의대 신설,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비대면진료)의 발전적 방안에 대해 협의체에서 논의한다.
4. 코로나19 위기의 극복을 위하여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긴밀하게 상호 공조하며 특히 의료인 보호와 의료기관 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시행한다.
5. 대한의사협회는 집단행동을 중단하고 진료현장에 복귀한다.
2020. 9. 4
보건복지부-대한의사협회
이에 의협은 정부가 의대증원 주장을 본격화한 직후부터 해당 의정협의 이행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의협과 협의' 없이, '의대정원 통보 등 일방적 정책 추진을 강행'하는 방법으로, 지난 2월 2000명 의대증원 정책을 일방 발표했다.
대한의사협회는 "2000년 의약분업사태 때 정부는 건보료 국고지원 50% 달성 등을 약속했지만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이행되지 않고 있고, 2014년 의정협의를 통해 PA(진료지원인력) 양성화를 강행하지 않겠다던 약속도 최근 헌신짝처럼 져버렸다"면서 "지난 24년간 정부는 의료계에 약속한 의정협의 결과를 한번도 제대로 이행한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의료계 관계자는 "문제의 핵심은 의대 증원 숫자가 아니라, 9·4의정합의 파기 등에서 비롯된 신뢰 붕괴"라면서 "적지 않은 의사들이 정부의 이번 대화 제안을 단순히 금번 의료사태 국면을 회피하기 위한 방책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그는 "의료계가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문책, 2025년 정원 재논의 선언 등을 거론하는 것은 단순히 향후 협상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선전전이 아니라, 사태 해결에 대한 정부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며 "정부가 대화를 원한다면 의료계에 논의 참여만 재촉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달라진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