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의 삶과 디아스포라의 삶 '마종기론'
의사였을 때는 보이는 것을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보는 것이 중요했고 들리는 소리를 확실하고 분별 있게 듣는 것이 필수였다. 그런데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보고 싶어서이고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듣고 싶어서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시도하지 않는 시인이라면 시인의 감수성이나 상상력이란 것이 어디에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종기 <천사의 탄식> 표4글 중에서)
내가 독자로서 마종기 시인을 만난 것은 의과대학 시절이었다. 시나 소설은 애써 멀리했던 시절이었지만 우연히 만난 '바람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첫 구절을 외우고 다녔다.
의사가 되고 문학 지망생으로 시를 공부하면서 내 문학의 화두는 생명이었다. 의학과 관련된 시들을 찾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그를 대면할 수 있었다.
2008년 5월, 코엑스에서'의협 창립 100주년 기념 제3회 의사 문학제'가 있었다.
마종기 회원의 사회로 막을 올린 의사문학제에서는 '치유수단으로서 의료문학'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했다. 학술대회 조직위원회는 <의학은 나의 아내, 문학은 나의 애인>을 선보이며 의학과 문학의 만남의 장을 마련했다. 처녀 시집 <극락강역>이 의사 문학상 수상 작품으로 선정돼 학술대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마종기 시인을 처음 만났다. 나는 애독자임을 밝히고 그에게 인사했다. 그의 손을 잡게 됐을 때 지면으로만 만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깊은 울림이 있는 영혼을 가진 자만 가질 수 있는 미소를 볼 수 있었으니. 그는 갓 등단한 나를 문학인의 일원으로 가족처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2013년 6월, 동부 이촌동 대한 의사협회 3층 회의실에서 '제4회 문학의학학회 학술대회'가 열렸다.
'의학, 문학에 감염되다'라는 주제의 학술대회에서 당시'문학의학학회' 회장인 마종기 시인을 다시 만났다. 나는'의사 문인, 나의 문학을 말한다' 발제자로 참석했다. 의사 문학상 수상자로 여러 문인과 의사들 앞에서 발표하는 자리라 떨리는 마음으로 강의를 마쳤다. 뒤풀이 장소에서 다시 만난 그는 나를 익숙한 동료처럼 대해 주었다. 정확히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과분한 칭찬이었음이 분명하다.
2022년 10월 인사동에서 '한국의사시인회 10주년 기념 마종기 시인 초청 간담회'가 있었다.
번개모임 형식으로 이뤄진 조촐한 만남이었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좋은 시(詩) 많이 쓰세요."
그는 정성스레 친필 사인을 해주고 기념사진을 찍고 시를 낭송하며 흥겨운 시간을 같이 보냈다. 즐겁게 식사하고 술잔을 나누며 허물없이 대해주는 그는 마치 오랜 친구 같았다. 80대 중반이지만 몸은 여전히 꼿꼿하고 말에서는 기품이 느껴졌다.
다시 시의 본류로 돌아가 보자. 마종기 시인을 대표하는 수식어는 의사 시인이다. 생의 대부분을 의사로 살다가 의사로 은퇴했으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또한 빠짐없이 등장하는 수식어는 디아스포라의 삶이다. 반세기 이상 미국에서의 삶을 버틴 것은 '시심'(詩心)이었다고 고백했다시피, 떠나온 곳은 있으나 돌아갈 곳이 없는 채 미국이라는 낯선 곳에 살았으니 이 또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는 은퇴 후에도 플로리다에 거주하며 꾸준히 시를 쓰고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삶과 귀소본능 사이의 간극을 문학으로 채우려는 듯, 일 년에 한 번씩은 고국을 방문하고 지인들을 만난다. 시를 쓰는 의사로서, 또한 미국에 사는 한국인으로, 늘 경계인으로 살아왔던 그에게 그것은 문학에 대한 본능이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고 타지에서 느끼는 외로움이기도 할 것이다.
악어는 모두 혼자 산다. 짝짓기의 며칠과 새끼 키우는 철을 지나면 모두 혼자서 자고 먹는다. 날카로운 3천 개의 이빨이 악어의 일생 중에 부러졌다가 다시 생긴다. 따뜻한 기온에서 부화된 알은 모두 수컷이 되고 차가운 물에서는 암컷만 나온다. 물에서는 귀와 코와 기도를 닫고 눈꺼풀 하나도 닫는다. 악어는 파충류, 그렇게 왔다 갔다 물에서도 땅에서도 산다. 고국과 외국에서 오락가락 살고 있는 나도 눈감고 사는 파충류, 또는 양서류인가.
20년 전쯤 내 친구는 악어를 조심하라며 복개된 청계천 밑에는 악어들이 새끼 치며 산다는 소문까지 일러주었다. 그 악어들이 다 자라서 한강으로 내려가 살고 있는지. 황해나 태평양 바다에서는 오래 살 수 없을 테니 지금은 누구 가슴에 숨어 살고 있을까. 얼마 전 환하게 복원된 청계천에는 맑은 물에 물고기들이 뛰며 놀던데. 기념식 날 청계천에서 만난 그이들이 설마하니 악어의 환생은 아니겠지.('악어' 부분)
날이 갈수록 고국에 대한 향수는 더 깊어지는 듯했다. 그가 태어난 고국도 생의 터전이었던 미국도 온전히 그를 품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국과 외국에서 오락가락 살고 있는 나도 눈감고 사는 파충류, 또는 양서류인가" 자문한다. 한강과 태평양을 오가며 살고 있는 자신이나, 청계천에서 만난 친구들의 모습도 악어의 환생은 아닐는지 상상해 본다. 그런데 "악어는 왜 아직도 아무 말 없이 뻘밭을 기며 외국에서 혼자 사는"지 반문하면서.
그는 생의 많은 시간을 미국에서 살았지만, 모국어에 집착하고 한시도 손에서 시를 놓지 않았다.
"의사와 문인. 내게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때로는 분초를 아껴 허둥대며 살아왔지만 되돌아봐도 나는 한 점의 후회가 없다. 나는 내가 시인이었기에 외국에서 힘들다는 의사 생활을 잘 이겨냈고 오히려 동네 의사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었다. 내가 의사였기에 오랜 세월 한 해도 그치지 않고 모국어로 시를 써올 수 있었다고 믿는다."
지속적으로 시를 발표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시집을 내던 그가 2020년 시집 <천사의 탄식>에 이어 2021년 산문집 <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을 연이어 발간한다. 웬만한 젊은이라도 혀를 내두를 노익장을 과시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 두 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멈추어 버린 엄혹한 시절이 아니던가.
기댈 곳이 정말 없네. 어디에 누워도 메마른 신음, 어디에 가도 목이 막힌 주검들. 지친 몸 쉴 곳 없는 낯선 땅이 내 상처였지. 창궐하는 역병은 세상을 찌르고 사람들은 수없이 죽어서 쌓이고 매장할 곳도 화장할 곳도 없다는데 60년 전 시인이 되겠다고 한 건방진 약속, 늦었지만 이제 취소합니다. 숨 쉴곳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중략-
거의 끝나가는구나. 다리를 끌며 앞서가는 이, 눈에 익은 뒷모습이 반갑다. 살아오면서 자주 들었던 한숨 소리는 더 이상 기대하지 말라는 게 아니었구나. 쓰러져 피흘린 자에게 들리던 탄식은 다시 시작하라는 신호. 눈을 뜰 줄 몰랐으니 한숨의 의미도 몰랐던 거지. 우리는 결국 다 함께 일어난다는, 다정하게 들리는 저 천사의 탄식!(<천사의 탄식> 부분)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갔던 2020년의 봄. 선진국을 자처하는 미국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간호사는 방호복이 없어 쓰레기봉투 비닐을 뒤집어쓰고, 의사는 밀려드는 환자로 카메라 앞에서 비명을 지른다. 장의사들은 밀려드는 시신들 앞에 주저앉아 있고 대형 회의장은 입원실로 개조됐다. 아름다운 센트럴파크 한복판에 야전병원이 설치되고 냉동 트럭에 시신을 안치하고도 모자라 하트섬에 무연고자 시신을 집단 매장한다.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상황, 인정사정없는 바이러스는 인간의 삶의 형태마저 바꾸어 놓았다. 하찮은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에 "60년 전 시인이 되겠다고 한 건방진 약속"을 취소하고 "숨 쉴곳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의사이자 시인이자 신앙인으로 살아온 그가 택한 삶의 방식은 "거의 끝나"간다는 한 가닥 희망이다. "쓰러져 피 흘리던 자에게 들리던 탄식"은 "다 함께 일어난다는" 천사의 탄식이 된다. 이렇게 한숨의 의미도, 천사의 탄식도 새로운 의미망으로 재탄생되고 결국 천사들의 탄식이 한데 모여 세상은 평온을 되찾게 된다는 전환이 놀랍지 않은가.
돈을 빌려 외국에 왔다.
밤낮없이 일해서 빚을 갚고
돌아가지 못할 나라를 원망하면서
남아 있던 외로운 청춘을 팔았다.
변명도 후회도 낙담도 아양도 없이
한길로 살아온 길이 외진 길이었을 뿐
피하지도 숨지도 않고 사라진 이슬.
어디로 갔을까 찾기 전에
이슬이 만든 무지개가 피어난다.
모두 떠난 자리에 의연히 서 있는
예언자의 훈장처럼, 눈빛처럼!('이슬의 명예' 부분)
이른 아침 이파리에 맺혔다가 햇빛이 나오면 금세 사라져 버리는 게 이슬의 운명이다. "변명도 후회도 낙담도 아양도 없이" 한길로 살아 온 외진 길이 의사의 삶이고 시인의 삶이었을 터. 그런데 "피하지도 숨지도 않고 사라진 이슬"처럼 좁쌀 같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습도 이슬과 다를 게 없다. 인생무상을 말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초월의 자세를 말한다. "부드러운 언어로 삶의 생채기를 어루만지고 세상의 모든 경계를 감싸 안는 시인"이라는 세간의 명명처럼. 그에게 시는 애초부터 사랑의 대상이었지 분석과 해석을 요구하는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내 아버지 저기 오신다.
나무숲 사이로 웃으시면서
나를 향해 넘치게 오신다.
임종의 자리도 지켜드리지 못한
그리운 내 아버지 환하게 오신다.
두 눈 뜨거워져 어지러워진다.
참아왔던 새 말들이 쏟아져나온다.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다.('여름의 어른' 부분)
마종기 시인은 미국으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인 마해송 작가의 급작스러운 별세 소식을 듣는다. 게다가 젊은 나이의 동생까지 세상을 뜬다. 하지만 그의 시는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쉽고 단정한 언어들로 슬픔까지도 따스하게 보듬는다. 삶에서 연유하는 고통과 절망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린다. 아버지가 오시는데 "나무숲 사이로 웃으시면서/ 나를 향해 넘치게 오시는" 것이다. 슬픔을 넘어선, 무연한 초월의 세계가 시를 감싼다. 당당하게 삶을 마주하는 방식은 유랑에서 희망을 품는 그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가 끊임없이 유랑의 길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다시 가게 된 것은 조바심 때문이었다.
나이는 들어가고 겁도 늘어나고
돌아보아야 점점 좁아지는 세상에서
높고도 더 높은 유정천의 하늘을 만나
보이는 것이 끝일 수 없다고 말하려 했다.
고집도 늘어가고 트집거리도 늘어가고
주위로 막아선 높은 벽들은 가슴을 조이고
내 힘으로는 두들겨 깰 수도 없으면서
무엇이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 알고 싶었다.('파타고니아식 변명' 부분)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님을 유랑이라 일컫는다면, 그가 택한 방식은 완전한 유랑은 아니다. 유랑으로 일시적인 안정과 평화는 누릴 수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 꿈틀대는 귀소 의식을 잠재우지는 못한다.
"돌아보아야 점점 좁아지는 세상에서/ 높고도 더 높은 유정천의 하늘을 만나/ 보이는 것이 끝일 수 없다고" 세상을 떠돌면서도 내내 마음의 안식처로 삼고 있는 것은 귀소본능이다. 그가 최종적으로 밟고 싶은 곳 역시 서울의 흙이다.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고달픈 유랑을 끝내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흙은 서울의 흙이든 해외의 흙이든
인간의 몸을 채우는 재료라지만
같이 살던 흙에서 떼어 놓으면
천천히 사라지고 마는 것인지
혼자 산다는 게 그렇게 힘든 것인지
싱싱한 냄새도 풀 죽어 시들고
꽃을 키우던 든든한 힘줄도 보이지 않는다.
인연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모르지만
일부러 헤쳐 만든 인연은
오래 가지 않는다.
흙이 왜 흙을 그리며 쓰러지는지
누군가는 언제쯤 내게 알려주겠지.('서울의 흙' 부분)
지난해 잠시 귀국했을 때 인사동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의사이면서 시를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근거 중심의 학문에 길들어진 의사들은 과학적 사고 보다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비유에 약할 수 있다. 제유나 환유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좋은 시를 쓰는 의사 시인들도 많지만, 평론가들에게 저평가받는 게 안타깝다는 개인적인 소회도 밝혔다. 그는 산문집 <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에서 의사로서의 삶이 문학의 갈림길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고백한다.
"내가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은 엉뚱하게도 몹시도 망설이며 힘겨워했던 의과대학의 본과 학생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특히 해부학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부터였습니다. 내 앞에 통째로 누워 있는 시체를 찢고 자르고 만지면서 인체의 세부를 눈과 손과 가슴으로 느껴야 했던 그 새로운 경험은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다 선명하고 구체적이게 해주었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고 내 문학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시인 마종기는 일본 도쿄에서 동화작가 마해송과 여성 무용가 박외선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서울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연세의대 재학 중,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해부학교실', '나도 꽃으로 서서'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의예과 공부를 하면서도 꾸준히 시를 발표하면서 모교 '연세문우회' 활동을 하던 중에 첫 시집 <조용한 개선>으로 제1회 연세문학상을 수상했다. 군의관 시절, 두 번째 시집 <두 번째 겨울>을 출간했고 오하이오주립병원 수련의 시절에 황동규, 김영태와 함께 3인 시집 <평균율>을 출간하기도 했다.
오하이오의대 영상의학과와 소아청소년과 교수 시절 그해 최고 교수에게 수여하는 '황금사과상'을 수상했다. 이후 털리도 아동병원 방사선과 과장, 부원장까지 역임하며 승승가도를 달린다.
40년간 의사로 환자들을 만난 시인은 은퇴 후에도 2002년부터 6년간 모교 연세의대의 초빙교수로, '문학과 의학' 강의를 통해 예비 의사들에게 문학과 인문학의 관심을 독려했다.
등단 55주년인 2015년 시집 <마흔 두겹의 초록>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고, 2019년에는 영시집 <Forty Two Greens>(마흔두 개의 초록)가 뉴욕의 코드힐 프레스(Codhill Press)를 통해 출간됐다. 등단 60주년인 2020년 <천사의 탄식>을 펴냈으니 여전히 현재형의 시인임에 틀림없다.
"시는 사랑의 한 표현 방법이고 체온 나눔이고 생환 훈련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한세상 시를 사랑하며 살았다. 시의 목표가 사랑이 아니라면 그런 시는 내게 필요 없는 존재다. 왜냐면 세상은 보기보다 잔인하고 외롭고 힘들기 때문이다. 시는 삭막한 세상에서 상처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아마도 내 직업이 의사였던 때문일까. 내 관심사는 언제나 삶과 죽음, 고통과 희생과 보살핌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내게는 제스처이고 껍데기이고 믿을 것이 못 되는 것들이었다." (<천사의 탄식> 표4글 중에서)
그의 깊고 융숭한 사유는 의사의 삶과 디아스포라이의 삶 사이 어딘가에 거처를 두고 있는 듯하다. 시인은 "모국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다는 게 내 평생의 한"이라고 말했다. "인생에 있어서 후회하는 건 별로 없어요. 하지만 지금 이 나이가 되어 가만히 보니까 한 가지 실수를 했어요. 한국을 너무 오래 떠났다는 거예요. 언제라도 원할 때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유목민처럼 유랑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추구하고자 하는 시 세계는 귀소본능이 아닐까. 그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다시 만나야 하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다. 나는 그의 마지막 여정이 궁금치 않다. 그는 영혼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여러 차례 그 심경을 밝힌 바 있으니까.
오늘도 살아 있다! 어느 신문 기사 같이
얇고 매끄럽게만 살아온 자의 빈 무게,
해마다 날마다 일정 맞춘 계산으로
줏대 없이 살아온 방향 잃은 야성들,
지상의 날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 가서 누구에게 내 길을 물어볼 거나.('자화상 2' 부분)
"나는 오늘도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늦은 나이의 하룻밤을 지새우며 볼품없는 시 한 편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운다. 가족도, 이웃도, 그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외국의 하루, 혼자 목소리를 낮추어 새로 만들어본 시 한 줄을 가만히 읽어보고, 내가 좋아하는 한국 시인의 시도 정성껏 읽어본다. 그리고 그 시에서 우러나오는 빛나고 뿌리 깊은 기쁨을 혼자 은밀히 즐긴다."
시작(詩作) 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에서 밝힌 고백이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나의 시도, 그의 시처럼 깊고 융숭해지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꿈일 것이다.
"나는 내 시가 한국 문학사에 남기보다는 내 시를 읽어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남기를 바란다."
그의 내밀한 고백을 마치 나의 고백처럼 받아 적다가 밖을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온다. 문학과 의학의 경계에서, 시인과 의사의 경계에서 나 역시 문학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선 느낌이다. 늦은 나이의 하룻밤을 지새우니 가슴께가 뜨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