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매 이후 3 손명세

보라매 이후 3 손명세

  • 김영숙 기자 kimys@kma.org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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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대법원에서는 의료계와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던 보라매 병원 사건에 대한 최종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은 환자의 보호자가 의사의 충고를 거절한 채 퇴원하려 한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방조죄의 죄책을 인정하였다. 그동안 의료계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오던 일들을 사법적 제재 대상으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의료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충격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개선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그동안 우리나라의 의료에 있어서 법적 제도적 기준이 정비되지 못했던 점과, 우리나라의 의학교육제도에 내재되어 있던 문제점이 현실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의사들이 임상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료법윤리 문제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의학교육의 개선방안을 제시해봄과 아울러 사회제도적 측면에서 어떤 합리적인 법적, 제도적 기준을 마련이 필요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나라의 의학교육제도에 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료윤리가 의과대학에서 필수적인 강좌로 자리 잡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거의 모든 대학에서 의료윤리를 강의하고 있으며 대학에 따라서는 학점을 부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의료법은 의사국가시험에 한 과목으로 포함되어 대부분의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의료법, 의료윤리 교육이 일반화 된 것은 의료 행위가 본질적으로 윤리적 측면을 포함하고 있으며 쉽사리 법적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한 결과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의료행위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측면은 의료인들이 의료관계 법률을 이해하는 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의료법, 의료윤리 교육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점에서 한계점을 지니고 있는데 임상경험을 아직 갖지 못한 예과 학생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과 이에 따라서 임상경험을 통해 윤리적 문제에 접근하는 것에 비해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수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 윤리 교육이 이론에 한정될 경우 학생들에게 적절한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으로 몇몇 의과대학에서는 임상에서 실제로 발생한 법적, 윤리적 문제를 토론의 주제로 삼아 강의를 진행하기도 한다. 또한 이 토론에는 의사들만이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인, 법조인, 윤리학자 등이 참가하여 토론을 진행하는데, 이런 실제 사례를 통한 교육은 학생들에게 법적, 윤리적 문제를 대비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의료윤리 교육은 임상 경험을 가지게 되는 본과 3학년 이후에 시행해야 할 것이다.

한편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의료윤리학, 법학의 문제-특히 사례에 대한 판단을 평가하는-를 의사 국가고시에 반영하여 의료법, 의료윤리학의 기본적 원칙 및 태도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는 과도한 교육과정과 맞물려, 단순한 학교 교육으로는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국가시험에 의료법은 오래전부터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의료법은 단순한 법조문 암기를 통한 형식적인 통과의례에 그쳐왔다. 그러나 법률의 적용은 몇 구절 법조문의 암기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실제 임상현장에서 닥치는 문제 해결에 의료법, 의료윤리학 수업에 배운 내용이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문제가 따르게 되었다. 따라서 현실에 적용가능한 의료법, 의료윤리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학생들이 현실 적용 중심으로 의료윤리, 의료법에 접근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의료법윤리 문제를 의사국가시험에 출제하여,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의료법윤리 사례와 의료 과오 소송 사례에 대한 판단능력 및 지식을 평가한다. 아래에서 제시되고 있는 미국의 국가시험에서 출제되고 있는 의료법윤리 문제유형을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먼저 첫 문항은 환자에 대한 바람직한 윤리적 태도를 임상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과 연결시키고 있고, 두 번째 문항은 의료과오소송사례를 통해 행해져야 할 적절한 법적 조치 묻고 있다.
 
심각한 심장 질환을 앓고 있는 80세 여환에게 유방암이 발생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의 아들은 "유방암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환자는 죽고 말 것이니" 의사에게 유방암의 소견을 밝히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유방암 소견과 관련하여 의사가 취할 올바른 행위는?

① 즉각 환자에게 알린다.
② 아들이 환자에게 알리도록 한다.
③ 암 환자 지원그룹의 한 사람이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한다.
④ 그녀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이 건강에 미칠 영향을 검토하도록 한다.
⑤ 아들의 입회 하에 환자에게 알린다.
 
45세 여환이 척수 수술을 위해 척추 마취를 받았다. 그러나 수술 결과는 좋지 않았고 환자는 마취과 의사와 외과의사를 상대로 의료과오소송을 제기하였다. 환자가 소송에서 승소하려면 다음 중 의사의 어떠한 과실을 증명해야 하는가?

① 수술의 결과로 신체적인 기능을 잃었다.
② 의사는 의료의 기준에서 현저히 벗어난 치료행위를 하였다.
③ 두 명의 의사 중 한사람이라도 그의 전공분야에서 전문의 자격을 얻지 않았다.
④ 수술의 결과로 수입을 잃게 되었다.
⑤ 수술의 결과로 지속되는 통증을 겪게 되었다.

위와 같은 사례 중심의 교육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수련기간에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수련기간은 의과대학생으로 일종의 보호막에 싸여 있던 의료인이 실제로 환자 진료의 책임을 지게 되는 시기이다. 이때는 환자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되는 동시에 의료현장에서의 갈등관계를 심각하게 경험하는 시기로서 의료윤리, 의료법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라 하겠다. 이 시기 윤리적, 법적 문제에 대한 해결 경험이 이후 의료 수행에 있어 가치관을 구성하고 의료법, 의료윤리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식의 근간을 이루게 되므로 매우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임상 수련기간 동안 발생하는 의료법, 의료윤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계기 삼아 깊이 있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본다.

이런 깊이 있는 교육은 우선 임상 보수교육에 의료법, 의료윤리 교육을 포함시킴으로써 가능해 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교육은 우리나라에서 임상보수 교육이 활성화 된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일이긴 하다(우리나라의 경우 이수해야 하는 임상보수 교육은 연간 8시간에 불과하며 그나마 이를 시행하지 않은 경우 제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서유럽의 경우 연간 40에서 80시간의 보수 교육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며 이중 20%는 법윤리 교육에 할애된다. 의사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는 측면에서, 환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인간적 대우를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을 의사들에게 교육시킨다는 측면에서 임상보수교육에서 의료법, 의료윤리를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는 주로 의학교육제도적인 측면에서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다루었다. 이런 교육은 의료인의 개인적 역량을 강화하고,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료는 사회적 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의료와 관련된 법적 윤리적 문제는 한 개인의 역량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사회제도적인 기준이 정비되고 마련될 필요가 있는데 무엇보다 윤리적, 법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 모색을 합의를 통해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한 개인에게 지워지는 윤리적, 법적 책임을 완화해 주는 방식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런 방식으로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임상윤리학자의 활용 및 병원윤리위원회의 활성화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임상윤리학자가 병원에 상주하여 윤리적 문제에 대한 상담을 해주며 해결책을 제시하고, 많은 이들의 토론이 필요한 경우에는 병원윤리위원회에 논의를 부탁하기도 한다.

윤리적 결단은 개인의 몫임이 분명하나 결단에 도달하는 과정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하는 제도라 하겠다. 그 밖에 의사의 충고에 반하는 퇴원을 결정하거나 치료중단의 문제와 관련하여 병원 내부에서 해결이 곤란한 경우가 있다. 이때 법원에 환자 측의 퇴원 금지 내지 치료계속의무를 부과할 수 있도록 가처분 제도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 법원은 업무과중 등을 이유로 가처분제도가 제대로 활용되고 있지 않은데, 앞으로 보라매병원 사건과 같은 불미스러운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법부가 의사의 충고에 반한 퇴원이나 치료거부 등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신속하게 처리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의료인들이 다양하고 복잡한 의료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합리적이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방안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회제도적 접근이든, 교육의 강화이든 개선방안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의료인들이 의료 현장에서 직면하게 되는 법적, 윤리적 문제를 우리 사회가 중요한 가치판단기준으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사회전체의 의지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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