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창간]참 의료를 위한 개혁과제/이 시대 의사 생존권·醫權의 의미

[2000창간]참 의료를 위한 개혁과제/이 시대 의사 생존권·醫權의 의미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0.03.21 15:06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경표(광주·홍경표내과의원)


의료보험의 실시로 시작된 막연한 불안은 비로소 지난해 11월 15일 약가인하와 실거래가 상환제로 현실화되었다. 세계적으로 의사의 입지가 약화되는 경향은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유독 한국의 의사는 생존권마저 위협받을 정도의 위기상황이라는 것은 적어도 의사 내부에서는 이견이 없는 듯 하다. 고도로 전문화된 의업이 직업적 성취감은 고사하고 생존권 문제에 당면하고 있다면 이미 도덕적 사회라고 할 수 없다.

한편 사회학자인 조병희교수는 한국의 의사들이 위기상황에 대해 공감하지만 그 근본적 원인과 대책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의료정책 결정과정에서 의사의 소외, 저부담·저급여·저수가로 표현되는 의료보험제도의 문제점, 의료전달체계와 의료분쟁에 관한 제도적 미비, 재벌의 병원에 대한 기부가 아닌 직접투자와 경영, 이로 인한 의사의 프롤레타리아화, 시장원리를 빙자한 무간섭주의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정부, 의료일원화의 외면, 공공연한 무자격 의료업자의 활동, 언론의 선정적이고 편향된 시각 등 의료계 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분노하고 있으나 정작 의료계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가 별로 없었다.

1993년경에 의사회와 의료계 일부 단체에 의해 `의사의 위기'가 거론되고 해결책 중 하나로 내부의 반성을 거론했던 것이 고작이다. 의료계 외적인 문제가 아무리 중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불만만 토로할 뿐 의료계 내부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공감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의사가 진정으로 위기상황에 직면하거나 인식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의료계 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논자들이 충분히 지적할 것이라는 점과 그 문제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속시원한 카타르시스는 될 망정 심리적 자위행위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글은 의료계 내부의 반성으로 출발하여 원인을 찾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日帝 '施惠'개념서 출발>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점하에서 수동적으로 서양의학이 도입되었다. 의사의 권위 또한 서양의사의 권위가 직수입되었으며, 일제의 `위생경찰제도'에 의해 의권은 실체 이상으로 상승되었다.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일본 천황의 성은이 식민지 백성에게 두루 미치도록 하는 시혜(施惠)'라고 했다. 시혜란 국가나 천황이 내리는 선물을 뜻한다.

따라서 의료서비스는 환자의 권리가 아니라 국가가 하사하는 선물이고 이러한 일방적 시혜는 국가-환자·의사-환자 사이의 권위주의적 관계를 의미한다.
한국의 의사는 국가의 필요에 의해 즉, 구조기능론적 관점에서 수동적인 의권이 설정되었으므로 그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반면 서구에서는 19세기 산업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중간계급 이하였던 의사의 신분이 점차 상승되었는데 의사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전문지식의 습득,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회적 소명의식의 실천, 내부의 자율적 통제력의 유지 등으로 소위 `돌팔이'의사를 몰아내고 국민의 건강을 수호하는 전문직업인이라는 독자적 권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서구의 의사는 경쟁론적 관점에서 능동적으로 지위를 확보한 것이다.

<지적능력과 직업 소명의식>

전문직업은 일반직업과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구별된다. 고도로 전문화된 지적능력과 사회에 대한 직업적 소명의식이다.

환자는 인격체가 아닌 질병체로 취급되기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는 순간 비인격화의 시련, 자아의 상실, 신체와 물리적 환경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과 같은 문화적 충격을 경험한다. 또한 치료의 효율성은 병원을 위한 것이지 환자의 편의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는 안락사·낙태 등의 의료윤리적 문제, 과잉진료·의료계 비리·임의적 비급여와 같은 영리성 추구와 더불어 신뢰와 권위를 실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최소한 자신이 선택한 개개의 의사에 대해서는 일정한 신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집단으로서의 `의사'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기만 하다. 그 이유는 집단으로서의 의사가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국가 재정지원 자율성 간섭>

대공황 이후 미국의 어려운 시절에 정부와 개혁주의자들이 의료보장·의료보험을 도입하여 저소득층을 보호하려 했을 때 의사들은 의료에 대한 국가의 재정지원을 반대했다.

국가의 재정지원은 의사의 자율성에 간섭하는 빌미를 제공하여 의료인에 대한 외부적 통제를 초래한다고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의료보험은 부유한 계층에는 쓸모 없는 것이며 저소득층의 질병으로 인한 가계파탄을 방지하여 최소한의 사회정의와 온정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의 의사들은 빈민에 대한 무료진료를 약속했고 의학회는 의사집단의 이익보다는 순수한 학문의 발전과 보급, 의사 윤리강령의 실천 등으로 내부의사를 자율적으로 통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그들의 영역과 권위를 확보했다.

<'환자에 최선'만으론 한계>

의학의 목적이 건강의 증진과 회복이며 세계보건기구가 정한 건강의 개념은 `질병이나 쇠약함이 없을 뿐 아니라 육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완전한 안녕상태'라고 한다. 우리는 `사회적'이라는 말을 유념하여야 한다.

`독일 의학의 아버지'인 Rudolf Virchow는 “만약 의학이 인간의 병에 대한 과학인 것처럼 건강에 대한 과학이기도 하다면, 인간 고유성에 유효한 법을 제안하는데 의학 이외의 어떤 과학이 적합하겠는가? 의사는 일류 정치가의 동료로서 간주될 것이다. 의학은 골수까지 사회과학이다”. “의사는 천부적인 빈민의 대리인이므로 사회문제는 대부분 그들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규모가 큰 의학일 뿐이다”고 했다.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에게만 최선을 다하는 `미시적 의료'만으로는 개인적 인간관계가 개선될 뿐 의권을 세우는데 한계가 있다.
사회 일반의 합목적에 부합하는 `거시적 의료'를 통해서만 사회에서 요구하고 인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의사의 권위가 확립된다.

<윤리만 강요땐 좌절 뿐...>

신자유주의 정책은 부익부 빈익빈을 악화시킨다. 사회 전반적 경향과 다르지 않게 의사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 대형자본에 의한 소형자본의 잠식은 동네의원이 몰락하는 것을 당연한 추세로 만들었다.
결국 사회정의의 실현은 이타적 삶일 뿐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의사의 윤리의식이나 사회적 소명의식의 실천만으로 의사의 권위가 회복될 것이라는 생각은 비현실적이고 이념적 환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윤리만을 강요하는 것은 `반복되고 지속되는 깊은 좌절'만이 있을 뿐이다. 영국과 같은 사회주의형 의료체계는 물론이고 미국의 시장체제에서도 국가의 의료에 대한 개입은 단지 그 형태와 범위에 관한 논란이 있을 뿐 개입 자체의 필요성에는 이견이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개개의 병의원의 환자유치는 무한적 경쟁관계로 방임함으로써 시장경제원리를 취하는 것 같으나 전국민의료보험제도에 의해 통제되고 획일적 의료를 강요하는 면에서는 시장원리는 아니다.
또한 국가의 재정지원과 공적의료가 미약하다는 점에서 사회주의형 모델 또한 분명 아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지 않으면서 전문직업의 자율성을 권위적으로 통제하는 형태는 관료주의형 의료체계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모든 형태의 의료체계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영향을 받는 취약한 구조이다. 따라서 의사는 정치목적에 이용되지 않는 강력한 집단으로 거듭나야 한다.

의협은 강력한 리더십과 거시적 의료에 입각한 의료정책을 주체적으로 제시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의료주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현행 행위별 수가제(fee for service) 의 문제점을 개선한 DRG도 치료비가 더 비싼 병명을 허위로 붙인다거나(upcoding 또는 DRG creep) 한가지 치료를 여러 가지 치료로 분할 청구하는 편법(unbundle)의 문제점이 있듯이 제도의 선택보다 이를 대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추구하는 목적이 사회적 이익에 부합하고 의료윤리가 전제되어야만 정책을 만드는 의협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이다.
대규모 규탄대회를 가진 여의도 광장을 종말의 시점에서 선악이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아마겟돈으로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개혁의 객체가 되는 것은 실로 괴로운 일이다.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로부터 정화를 요구받기 전에 즉, 개혁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는 활로를 모색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