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자 신효숙 원장
· 1925년 서울 출생
· 1951년 전남의대 졸업
자신의 존재는 하나지만 나 하나의 희생과 노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사람. 그래서 깜깜한 밤, 자신의 몸을 사르며 다른 이들을 환하게
인도해줄 수 있는 촛불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 그것을 욕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고 있어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어린이의원의
신효숙 원장(74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 강릉시 어린이의원 신효숙 원장
여기 이런 욕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 자신의 존재는 하나지만 나 하나의 희생과 노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사람, 그래서 깜깜한 밤, 자신의 몸을 사르며 다른 이들을 환하게 인도해줄 수 있는 촛불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 그것을 욕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고 있어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어린이의원의 신효숙 원장(74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 특별한 존재의 의미가 되길 바란다. 시인 김춘수 님의 ‘꽃’에서처럼 사랑하는 이에게 있어 꽃이 되고 싶은 이도 있을 것이고 부모님에게는 효자·효녀가 되기를,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미래를 열어줄 수 있는 스승이 되길 간절히 원할 것이다. 타인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은 말만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바로 노력과 희생과 봉사가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에게 꽃이 되고자 하는 이는 자신의 욕심은 접어두고 더 큰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고 부모님에게 효자·효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더욱 공경해야 하며 제자들에게 있어 신망받는 스승이 되려면 더 큰 가르침을 주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 이다.
여기 이런 욕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 자신의 존재는 하나지만 나 하나의 희생과 노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사람, 그래서 깜깜한 밤, 자신의 몸을 사르며 다른 이들을 환하게 인도해줄 수 있는 촛불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 그것을 욕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고 있어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어린이의원의 신효숙 원장(74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가끔 주위의 친분 있는 사람들은 신 원장의 고집은 아무도 못말린다고 한다 이른 넷의 나이면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아야 할 때인데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에 더 신경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녀의 그런 고집이 있었기에 아직까지 세상에는 뜻있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신 원장은 1925년 4월 18일생으로 고향은 서울이다. 유복한 가정에 태어난 신 원장은 별 어려움 없이 유년시절을 보냈다. 유년시절 때부터 무슨 일을 하나 하더라도 다부지게 잘해내는 신원장을 보고 어른들은 그렇게들 얘기했다. 커서 무슨 일을 해도 잘 해낼 것라고. 그러나 인생의 굴곡은 의사로서의 꿈을 키우던 그녀를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시련으로 내몰았다. 고등여학교 1학년 때 승마교습을 받던 중 낙마사고로 인해 척추뼈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 상처는 지금까지도 그녀의 평생의 아픔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시련에서도 그녀의 의사에 대한 꿈은 꺾을 줄 몰랐다. 결국 그녀는 한국전쟁중이던 1951년 전남의대를 졸업하게 된다.
“전 아주 어릴적부터 그런 꿈을 꾸었어요. 의사라는 직업만큼 의미있는 직업도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그 주위의 가족들까지의 인생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의사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만큼 막중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51년 대학을 졸업한 신 원장은 계속 공부를 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래서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교실에서 조교로 첫 근무를 하게 되었다. 서울이 수복된 후 신 원장은 더 큰 꿈을 품고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하여 53년부터 5년동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교실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신원장의 성격은 자신의 공부에 대한 집념에도 잘 나타났다. 69년 우석의과대학교 즉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교실에서 다시 근무를 시작한 신 원장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평생교육이란 말도 있듯이 공부는 원래 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땐 공부도 중요하지만 나의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도 물론 중요했죠. 그래서 의원을 개원해 가정에도 신경을 좀 쓰고 나름대로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을 환자들을 위해 베풀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대학원시절 결혼을 한 신원장은 81년 남편과 함께 강원도 강릉시로 생활의 터전을 옮겨왔다. 맑은 공기와 신선한 바람이 부부내외를 반겼다. 제일 먼저 의원을 개원하면서 마땅히 의원 이름을 짓지 못해 고민하던 신 원장은 꿈에서 그 답을 얻었다고 한다. 나른한 오후 잠시 낮잠을 잤는데 하얀 모래가 덮인 사막에서 두 줄기의 빛이 비치더니 한 곳에 모이더란다. 그곳을 보니 아주 어린 아기가 신 원장을 향해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이며 안기려고 했다. 잠에서 깬 신 원장은 ‘그래 바로 그거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어린이의원’. 소아과의 이름에는 이보다 더 나은 이름도 없을 듯 싶었다. 정말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의원들은 이름만으로 무슨 과인지 잘 모르지만 어린이 의원은 그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기에 주위사람들은 아주 편해 한단다. 의원이름뿐만 아니라 어린이 의원을 찾는 이들은 신원장의 때묻지 않은 미소와 마음으로 인해 어린이의원의 주인으로서 그 자격을 몇배 인정한다.
신 원장은 유년시절 아주 특별한 꿈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퀴리부인’을 읽게 되었는데 왠지 모를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여자로서 당대를 대표할만한 유명한 과학자로 그 명성을 떨치는 그녀를 머리에 그려보면서 신 원장도 꼭 무언가를 이루어보리라 다짐했었다.
이런 꿈을 안고 있던 신 원장은 의과대학 1학년시절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의사가 된 것은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의술로서 세상을 널리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그래서 좋은 논문으로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지구촌 곳곳에서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큰 혜택을 안겨주리라 결심했죠. 그 꿈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생각에 열중하던 신 원장은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왜 우리나라에는 노벨상 같은 그런 의미있는 상이 없는 것일까’하고. 그래서 자신의 논문은 물론 이 세상의 질병을 다스릴 수 있는 더 좋은 의학논문이 탄생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97년 5월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것을 신 원장은 정말 행동으로 옮겼다. ‘심원(心元)’재단을 창단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재단이름은 신 원장의 호를 따서 만든 것으로 42억 상당의 부동산을 이 재단에 기증했다. 명망 높은 이들로 구성된 이사회를 기반으로 의학논문을 수합해 국내 명성이 자자한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거치게 된다. 그리하여 2년에 한 번 우수한 논문을 선정하여 ‘그리스도 의학상’이란 이름으로 상과 함께 상금이 수여된다. 국내뿐 아니라 국외의 의학자들도 모두 참여할 수 있는데 올해 9월 그 첫 시상식이 개최된다고 한다.
“노벨도 처음엔 3,000만원으로 그 상제도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큰 돈은 아니지만 그의 뜻은 수백만금의 가치보다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100년이란 무구한 세월이 흘렀어도 그의 숭고한 뜻과 그 상제도가 계속 이어져오고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저도 경제적인 사정이 풍족해 제가 가진 전부를 다 쏟은 것은 아닙니다. 우수한 의학논문을 통해 전 인류에게 혜택을 줄수 있고 좋은 치료법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사람이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값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 원장의 이런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남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은 존경어린 눈빛으로 그녀에 대한 찬사를 대신한다.
IMF시대의 도래로 인해 우리 주위 곳곳에서는 정말 살맛 안난다는 이들이 많다. 얼마전까지 실시된 ‘금모으기 운동’을 비롯하여 활발히 계속 진행되고 있는 ‘아나바다’ 운동은 얼마나 우리 국민들이 절약에 대해 인색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IMF라는 단어가 신 원장 한 사람에게 있어선 별 의미가 없다. 우리의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뿐만 아니라 아주 윤택했을 때에도 절약이 몸에 배어 살아온 그녀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람이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가 40년이 된 모자라고 하면 믿겠어요? 고등학교시절에 손수 뜨개질을 했다고 하는데 글쎄 흠집하나 없이 깨끗하게 지금까지 쓰고 다닌다니까요. 이것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아주 고약할 정도로 뭐하나 사면 10년 이상 가는 건 예사랍니다.”
남편의 말속에 은근히 신뢰가 넘친다. 얼마전까지는 고등학교시절 입었던 교복을 고스란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을 정도로 신 원장의 알뜰한 생활자세는 남편까지도 감탄할 정도라고 한다. 신 원장은 항상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알고 소중히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이들이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아무리 모진 IMF한파라도 충분히 감내하고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작은 것 하나에도 애착을 갖는 그녀이기에 그런 감정을 곧잘 시상으로 옮긴다.
이렇듯 틈틈이 쓴 시들을 모아 얼마전 ‘꿈속에서 받은 상’ 이라는 시집을 출간하여 주위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항상 마음이 울적할 때 물건 하나 풍경 하나에도 그 감정을 실어 시를 쓰던 신 원장에게 우연히 찾아온 손님이 그것을 읽어보고는 급히 챙겨들고 미당 서정주 시인에게 보였다고 한다. 서정주 시인은 그 시편들을 보고 당장 시집을 출간할 것을 권유했고 50여 편의 주옥같은 시가 담긴 시집이 출간되었다.
그 시집속에는 신 원장의 생활자세와 삶의 소망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신 원장은 자신의 풍요와 윤택한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못사는 이들을 위해 강릉성결교회에 5,000평 정도의 임야를 기증한 것을 보아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작 자신은 마르고 닳도록 아껴쓰고 절약하면서 못사는 이, 헐벗은 이를 보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신 원장은 앞으로 살면서 달리 욕심을 부리고 싶진 않다고 한다. 다만 지금 운영하고 있는 ‘심원재단’을 아무 문제 없이 이끌어나가 ‘그리스도 의학상’이 노벨상 못지 않은 가치를 발휘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우수한 의학논문을 통해 새로운 치료법과 처방으로 많은 환자들이 새 생명을 찾길 기원한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자기의 위치에서 뭔가 의미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저도 단지 제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할 뿐입니다. 전 그런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초는 불을 켜지 않았을 땐 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지만 깜깜한 밤에 불을 켰을 땐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어두운 밤길을 밝혀줍니다. 그 촛불과도 같은 존재, 전 그런 존재이고 싶습니다.”
고요하지만 반짝반짝 윤이 나는 신 원장의 눈빛을 보면서 필자는 그렇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지금 당신은 그 이상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