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교수(고려대 법대)
I. 종합대책안-타협의 묘약인가?1. 타협의 미학
최근(2001.5.31.) 김원길 장관이 내놓은 정부의 '건강보험 재정안정 및 의약분업 종합대책안'은 가히 '타협의 미학(美學)'이라고 할만큼 높은 정치적 감각을 보여준다. 먼저 종합대책안은 현행 사회보장적 의료체계가 직면한 재정위기를 '정부의 실패'나 '시장의 실패'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로써 의료영역에서 (정부의 실패나 시장의 실패를 지양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의료체계의 개혁방안은 모색하지 않게 된다. 종합대책안은 그 대신 의료체계를 사회보장체계로 짜는 기획 자체에 내재해있던 부분적 결함, 이를 테면 공공의료보험재정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메커니즘의 결핍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그러니까 의사사회의 여론과는 좀 달리, 이번 종합대책안은 어느 한 집단(예: 의사)의 부도덕성에다 의료체계위기의 원인을 전속시키지는 않는다. 또한 종합대책안은 해결점을 모색함에 있어서도 의료체계의 주체들인 정부, 의료공급자, 약사 및 의료소비자들에 배분되는 부담이 '절묘한 평형'을 이루도록 설계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쪽도 두드러지게 비난하지 않고, 어느 쪽도 더 불리하게 취급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정치적 감각은 정치적 합리성(사회통합적 효과)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종합대책안은 행정관료가 보여주기는 매우 힘든 정치관료만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세가지 비판명제
그러나 종합대책안의 기획에 따라 작성된(될) 국민건강보험법, 의료법 및 약사법의 개정안을 분석해보면, 이런 정치적 합리성의 극치는 결코 법적 합리성을 보장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법은 경제적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자원배분의 합리성을 도모하며(경제적 효율성), 사회통합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정치적 합리성), 아울러 삶의 세계에 전승되어 온 규범의 재생산구조 위에서 광범위한 합의를 창출할 수 있을 때(도덕적 정당성)에 비로소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종합대책안의 기획 아래 개정이 추진 중인 '국민건강보험 재정건전화 특별법', '의료법 개정안', '약사법 개정안' 등은 이런 의미의 합리성, 특히 도덕적 정당성을 기약해주지 못한다. 이 점을 나는 다음 세 가지 명제로 요약하고자 한다.
기획의 오류:첫째, 정부의 종합대책은 사회보장적 의료체계의 기능화를 위해-바꿔 말해 건강보험의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의료체계의 개혁을 하나의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 Sozialtechnologie)으로 기획한다.
방법의 오류:둘째, 정부의 종합대책은 의료체계의 사회공학적 기획을 추진하기 위해 기존의 의료체계에 각인된 권위적 관료주의를 다시 강화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기존의 의료정책에서 잘못된 방법을 더 많이(more of the same) 사용하는 것이다.
▲결과의 오류:셋째,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와 의료체계의 사회공학적 기획이 결합될수록 의료영역(의료생활세계)의 병리화는 더 악화된다(의료생활세계의 초토화).
II. 의료체계의 사회공학적 기획
종합대책안이 추구하는 기획은 한마디로-2006년에 이미-보험재정이 수지균형을 이루도록 의료보험재정의 유입(流入)과 유출(流出)을(의료체계 자체의 개혁은 없이) 체계내적으로 조절하는 밸브를 현행 사회보장적 의료체계에다 장착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①개혁을 오직 재정정책적 차원에 국한시킴으로써, ②동시에 현행 의료체계가 안고 있는 가치문제들은 철저하게 중립화(또는 외면)해 버리고, ③재정의 유,출입을 조절하는 밸브의 조작을 맡는 중심기구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러한 종합대책안의 기획을 나는 의료체계의 사회공학적 기획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1. 재정정책
첫째, 종합대책안의 재정정책적 차원은, 수입을 늘이고 지출을 줄이는 방안들로 짜여져 있다.
2. 탈이데올로기화(가치중립화)
둘째, 그런데 이러한 재정정책은 현행 의료체계의 틀에 대한 반성을 수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국민들이 어떤 의료서비스의 수준을 누려야 할 것인가(적정진료의 개념문제), 그것을 위해서는 전체사회적으로 의료체계에 얼마만한 재원이 할당되어야 하는가(예: 보험료율의 문제), 또는 의료재정의 조달을 얼마나 시장의 기능에 맡길 것인가 하는 등의 가치문제가 외면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재정정책은 의료보험재정의 파탄에 대한 책임을 특정 집단에게 전속시키지 않고, 의료체계의 각 주체가 가질 수 있는 도덕적 해이를 균형있게 포착하여, 그것을 바로잡는 통제적 규율을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행 의료체계의 재정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그러니까 종합대책안은 위기극복정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중성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3. 중앙관제센터
셋째, 종합대책안은 이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화된 재정정책을 보건복지부장관 아래에 설치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 통합적으로 위임하고 있다. 이 기구는 보험수지의 추이를 '계량적 분석'을 통해 면밀히 파악하면서, 보험수지의 균형을 달성하도록, 계량적 분석 결과에 따라 '그때 그때' 앞에서 열거된 수입증가방안과 지출감소방안의 실시여부와 강도를 '조절'하는 기구이다.
이 기구는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보험재정이 수지균형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보험재정의 유·출입 밸브를 공학적으로 조절하는 중심기구이다. 이 기구는 태생적으로 통합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조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런 조직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절되지 않을 경우에 보험재정의 유출입을 좌우하는 많은 요소들은, 적어도 현재의 사회보장적 의료체계 하에서는, 보험재정의 수지균형이라는 목표를 향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나아가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이질적이며, 자기고유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합대책안은 의료체계를 사회공학적으로 다시 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사회공학적 기획 아래서 2006년을 목표로 수지균형을 맞추려는 종합대책안이 예컨대 현행 공공의료보험체계에 터잡아 있는 기존의 다원적인 의사결정조직들(예: 보험료를 정하는 재정운영위원회, 수가,급여범위를 정하는 건강보험심의조정위원회)을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하나로 통합하는 까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합대책안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가 보험재정의 다양한 유,출입 밸브를 보험재정의 수지균형이 이루어지도록 공학적으로 잘 조작하면, 현행 사회보장적 의료체계가 제대로 기능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현재 의료체계의 현안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기획을 좇는 것이다.
III. 권위적 관료주의의 확장
그런데 이러한 의료체계의 사회공학적 기획을 추진하는 방법으로 종합대책안은 현행 의료체계를 아로새겨 온 권위적 관료주의를 또 다시 강화하고 있다.
이것은 ①종합대책안이 의료체계의 의사소통적 자율성을 현재보다 오히려 위축시키며, ②사회공학적 기획의 실현을 규제, 통제 및 처벌의 수단을 통해 '직접조종'(direkte Steuerung)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현행 사회보장적 의료체계의 구조적 결함을 다시 반복·강화하는 것(more of the same)이라 할 수 있다.
1. 의사소통적 자율성의 침하
종합대책안에 의하면 의료체계의 재정적 수위를 조절하는 중앙관제센터는 행정관료인 보건복지부장관의 직할로 운영될 예정이다. 이 기구의 설치는 그 자체로서 이미 기존의 공공의료보험체계에 터잡아 있는 의사소통적 구조마저 약화시킨다.
즉, 재정위원회와 건강보험심의위원회가 고유한 의사소통에 의해 각각 관할하는 사항들이 통합된다. 이 통합은 물론 각 위원회가 누리는 미약하나마 얼마간의 의사소통적 자율성이 의료보험재정의 수지균형을 맞추는 공학적 작동메커니즘으로서 부적합하거나 장애가 된다는 전제에 서 있다.
물론 조직상으로는 행정부에 속해있더라도, 그 구성이 의료체계의 재정조절을 상호이해지향적인 의사소통적 방식으로 할 수 있게 한다면 이 기구의 운영은 관료주의적 패턴을 좀 벗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법안은 이 기구의 의사결정을 궁극적으로는 보건복지부장관이 장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료주의에 의한 의사소통적 자율성의 위축은, 예컨대 진찰료와 처방료의 통합 등 수가와 관련한 최근의 조치가, 수가계약이라는 현행법상 보장된 의사소통적 과정이 아니라 건강보험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긴 하였으나 보건복지부장관의 일방적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점에서도 이미 잘 드러난다.
2. 직접조종과 관료적 통제
종합대책안은 중앙관제센터(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기획,결정되는 바를 의료체계의 개별적인 구성부문에 ①직접적으로, 그것도 주로 ②규제, 통제 및 처벌의 수단에 의해 집행·관철하고자 한다.
먼저 ①의료재정의 수지균형을 맞추기 위한 중심기구를 설치하고 이를 관료가 장악하게 한 것 그리고 이 기획을 실현하는 법안에 고시를 포함하여 수많은 위임입법 조항들이 득실거리게 한 것 등은 의료체계의 재정상태를 국가가 '직접' 조종하려는 구상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②종합대책안은 직접적인 조종의 방법으로 규제,통제,처벌의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여기서 규제(Regulation)는 의료영역에서 일탈행위적 성격이 없는 정상적인 행위에 대해 사적 자치 또는 민간자율의 이념을 배제하는 조치를 가리키고, 통제(Kontrol)는 의료영역에서 일탈행위적 성격을 띠는 행위에 대해 행정법적, 의료보험법적 제재, 기타 행정적 불이익을 주는 일체의 조치를 말한다.
그리고 처벌(Strafe)은 일탈행위에 대한 형사법적 제재를 의미한다. 다만 위의 분류는 견해에 따라 다소 다르게 분류될 수 있고, 하나의 조치내용도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동시에 지닐 수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IV. 의료생활세계의 초토화
이상과 같은 의료체계의 사회공학적 기획은 법이론적으로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런 기획으로 말미암아 의료개혁의 다원적인 지평이 거세되고, 실정법체계에 내재된 가치와 이념이 훼손되고, 의료생활세계가 초토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기획의 구상과는 달리-의료체계의 구조적 왜곡을 극복하는 개혁없이-수지균형에 지향된 재정정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화하는 것(위 II)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적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의료체계에서 어떤 재정정책도 의료체계의 구조적 개혁방향에 대한 가치론적 판단과 결정없이 전개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공학적 기획을 실행하는 방법으로 직접조종의 구상 아래 권위적 관료주의로 물든 규제,통제,처벌 중심의 방안들이 대량으로 채택된 것(위의 III)도 이미 이데올로기적이다.
왜냐하면 의료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간의 상호작용이 이미 관료적인 직접조종에 의해 장악될 수 없는 복잡성(Komplexit t)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규제·통제·처벌의 방법들은 의료체계의 근본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 채, 의료체계의 주체들이 누려야 할 인격적 가치를 훼손할 위험만 높이기 때문이다.
1. 법원리의 훼손
종합대책안의 사회공학적 기획은 많은 경우 법체계에 전승된 법이념이나 법가치 또는 개별법분과의 이성원칙(법원칙)을 훼손한다. 그 예를 들면 ⓔ환자 수에 따른 진찰료·조제료의 차등화는 요양기관이 공공의료보험의 가입자(국민)에게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의 실질적 차등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헌법상 평등원칙에 반한다.
또한 ⓐ수진자 조회의 마구잡이식 시행이나 ⓗ건강보험증 전자카드화는 개인정보에 대한 지배결정권(정보적 자기결정권 informationelle Selbstbestimmung)을 침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허위,부당청구의 형사처벌 가능성의 인정은 형법상 명확성원칙을 훼손할 위험이 높고, ⓖ야간진료의 가산율배제는-근로기준법에 직접 위반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요양기관근로자의 야간근로수당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동법상 근로자보호의 이념에 위배된다.
2. 의료생활세계의 병리화
종합대책안의 사회공학적 기획은 '왜곡된 의료체계에 의한 의료생활세계의 식민지화'를 넘어서 '의료생활세계의 초토화'를 가져올 위험이 높다.
그 이유는 첫째, 의료체계의 좀더 포괄적인 개혁을 통해 의료재정의 전체적 규모를 키우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주사제 처방료,조제료의 삭제, ⓙ포괄수가제 확대 그리고 특히 ⓓ진찰료와 처방료의 통합은 의료기관의 재정부담을 가중시켜, 탈·불법적인 진료행태를 조장하거나 현행 사회보장적 의료보험체계하에서 관료주의적으로 행해지는 진료행위의 규격화를 다시금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둘째, ⓚ저가약 대체조제의 인센티브제와 ⓞ처방전의 반복사용 그리고 ⓝ생동성 시험확대와 성분명 처방제 또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 펼쳐지는 치료적 대화의 궤도에서 조제와 투약을 이탈시키는 것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의사와 환자가 만나는 사회적 공간(의료생활세계)를 왜곡시킨다.
셋째, 여기서 더 나아가 허위,부당보험청구 등을 의료인의 결격사유나 면허의 취소,정지사유로 삼는 것은 의료인격 개념을 더 이상 '의사가 환자와의 치료적 대화를 전개할 수 있는 의사소통적 역량을 관리하는 제도'가 아니라 보험재정위기의 극복이라는 정책목표의 도구로 기능화시킨다.
의료인격 개념이 의료생활세계의 핵심요소임을 감안하면, 이런 단계에까지 이른 의료체계의 사회공학적 기획은 의료생활세계의 초토화를 향해 줄달음질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V. 정책대안의 방향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여러 지면을 통해 그 대강을 소개해 온 나의 개혁대안을 이번 종합대책안과 관련지어 몇 가지의 명제로 요약하기로 한다.
-정부는 의료보험의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론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실천적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많은 의료체계의 사회보장적 기획을 포기하여야 한다. 이것은 종합대책안에 관해 이 글에서 언급된 문제성있는 구체적인 조치들의 포기로 이어져야 한다.
-의료체계를 공공의료를 중심으로 하되, 부족한 의료재정의 조달을 위한 하부체계로서 민간의료부문을 형성하고, 양 부문간의 경쟁적 관계를 형성시킨다(의료체계의 다원화).
-공공의료부문이든 민간의료부문이든 규제,통제,처벌 등의 방법으로 펼쳐지는 권위적 관료주의의 폐해를 지양하고, 의료체계의 전체 또는 그 하부체계들이 대화지향적인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운영되도록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료체계의 모든 주체들에게 자율적인 인격의 지위를 인정하여야 한다(의료체계의 자율성).
-의약분업은 의사와 환자의 치료적 대화를 왜곡하는 제도로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국민에게 의약일체와 의약분업의 서비스를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되, 의료계와 국민에게 단지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의,약계가 자율적으로 각자의 직능정체성의 역사적 변화를 도모하면서 완전한 의약분업을 이룩하도록 유도하는 메커니즘을 마련하여야 한다(자율적 의약분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