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적 유통망... 과잉공급속 폐기 되풀이
개원가, 출장단체예접·보건소와 힘겨운 싸움
인플루엔자예방접종 시즌이 돌아왔다. 의료계와 질병관리본부 등은 최근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관련 안내문'을 발표, 10~12월을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의 최적기로 정하고 65세 이상 노인·만성 질환자·임신부·생후 6~23개월 영·유아 등을 우선접종권장대상자로 선정, 효율적인 예방접종이 가능하도록 할 방침이다.
백신 유통망 엉망 22% 폐기...한쪽에선 부족 호소
질병관리본부는 특히 2006~2007년 시즌부터는 평년에 비해 한달 늦은 10월을 예방접종 권장 시작 시기로 결정했다. 균주 생산이 늦어진 이유도 있지만 2004~2006년간 국내 인플루엔자 유행 현황의 통계를 뽑아 본 결과, 3~4월에 인플루엔자 의사환자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접종 후 2주 내 항체가 최고에 도달하고 6개월이 지나면 50%의 항체가 감소하는 백신의 특성을 감안하면 권장접종 기간을 종전보다 한 달여 늦추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또한 폐기 처분되는 백신의 양을 줄이기 위해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과수요를 줄인다는 계획이다. 접종의 안전성을 고려해 무분별한 출장단체접종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폐기처분되는 백신을 줄이거나 출장단체예방접종을 막기 위해 보다 효율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3개월여의 짧은 기간 동안 1천5백만명(질병관리본부 추정치)이 접종받는 한국 예방접종 현황의 특성상 공급기관과 접종기관간, 민간과 공공간의 효율적인 접종 체계를 갖춰 놓지 않으면 '접종대란'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한편 개원가는 개원가대로 '인플루엔자 특수'를 맞기 위해 백신 확보에 열을 내고 있다. 어려운 경영 현실에서 예방접종 특수는 놓칠 수 없는 효자품목이다. 그러나 전근대적인 유통망으로 일선 병의원에서는 적정량의 백신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아우성이지만 한해 폐기되는 백신의 양은 전체 22%나 되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10월부터 보건소와 병의원에 공급될 올해 백신량은 지난해 1670만도즈 보다 줄어든 1200만도즈가 될 전망이다.
전근대적인 유통망 과수요 촉발...백신 시장 교란
2005~2006년 전체 인플루엔자 백신 공급량(1670만도즈)의 22%(370만도즈)가 폐기 처분됐다. 공급가를 대략 1만원 정도(민간 병의원 기준)로 잡으면 한해 폐기되는 백신의 양은 370억원에 이르며 백신 5도즈 중 1도즈가 버려지는 셈이다.
문제는 엄청난 양의 백신이 폐기되는 반면 한쪽에선 백신을 공급받지 못해 발을 구르는 일도 생긴다는 점이다. 서울시의사회는 최근 백신을 제조하는 9개 제조사 담당자들을 불러 원활한 백신공급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지만 유통망의 구조적인 문제로 해결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찬바람이 불며 시작된 인플루엔자 접종 시즌이 시작되면 개원가는 바쁘게 돌아간다. 백신 제조사와 공급사들 역시 이 시기에 물량 확보 전쟁을 막 끝내고 병의원들에 대한 본격적인 마케팅에 들어가는 시기다.
제조사와 공급사들의 입장에선 백신은 한철 장사다. 10월에서 11월 본격적인 접종이 시작되고 그해 12월이면 이미 시장에는 재고 물품이 돈다. 백신의 원료인 '균주'를 전량 수입하는 한국의 제조사들은 해외로부터 백신을 공급받고 국내에 판매하는 중간 상인의 성격이 있다.
한해만 지나면 유행균주가 바꿔 재고품을 전량 폐기처분해야 하는 백신의 특성상 확보한 물량을 모두 팔지 못하면 제조사들은 미판매분만큼의 손실을 안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제조사나 중간판매상들은 반품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병의원들(지난해 반품처리를 많이 한 병의원들은 공급 회피 대상 1호다)에 선별적으로 백신을 공급하고 접종 특수를 맞은 병의원들은 남으면 언제든지 반품할 수 있는 백신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적정량 이상을 주문하는 '과수요 현상'이 생긴다.
물론 과수요 현상으로 생긴 백신은 백신시장을 교란하고 고스란히 폐기처분된다.
그러나 과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제조사와 병의원이 내놓는 입장은 상이하다. 과수요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판매상들은 접종하고 남은 백신을 모두 반품처리해 주는 업계 관행을 꼽고 있는 반면, 병의원들은 판매상들의 선별 판매 방식이 문제라는 인식이다.
아무튼 접종 시즌 내내 제조사들은 병의원의 주문을 받으면 관행적으로 주문량보다 적은 양을 공급하고 병의원들은 필요보다 많은 양을 주문하며 악순환의 고리가 되풀이 되고 있다.
더구나 예년에 비해 해외로부터 많은 백신량을 확보한 H백신사가 올해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할 것이란 소문이 돌며 백신 시장이 더욱 요동치고 있다. 당연히 폐기처분되는 백신 비율도 높아질 전망이다.
그러나 폐기되는 백신의 양을 줄이기 위한 정부와 질병관리본부의 대책은 전무한 실정이다. 질병관리본부의 한 관계자는 "일선 보건소에서 공급하는 백신은 조달청에서 일괄 구매해 계획 접종을 하기 때문에 폐기되는 양은 미미하다"고 전제하고 "민간 백신 공급시장에 질병관리본부가 관여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며 대책 마련에 난색을 표했다.
출장단체예접 자제 움직임...보건소와의 경쟁 구도도 문제
의협과 질병관리본부, 서울시의사회 등은 몇 해 전부터 안전성이 우려되는 '출장단체예방접종' 막기 위해 의료계와 사회·종교 단체에 협조 공문을 보내고 출장단체예방접종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대국민 교육지침을 발표하는 등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그러나 각종 사회복지 단체나 아파트 부녀회는 물론 종교단체들도 회원들을 대상으로 출장단체예방접종을 실시할 것으로 보여 이를 막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질병관리본부 역시 보건소에 출장단체예방접종을 하려고 신고한 단체들에게 접종 자제를 권유키로 결정했지만 행정적인 강제력이 없는 '권유' 수준이어서 효과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일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보건소의 예방접종이 '덤핑'이란 지적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질병관리본부는 8월말 조달청을 통해 1차 백신공급량 500만도즈 중 350만도즈를 확보했다. 질병관리본부는 1회 접종료로 지난해 3000원보다 크게 오른 7000원 정도를 산정하고 있지만 일반 병의원의 접종료인 2만원선과 비교하면 크게 낮은 가격이다.
보건소가 우선접종대상자로 접종 범위를 제한하고 있지만 병의원들이 느끼는 인근 보건소하고의 경쟁 구도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의료계의 한 관계자는 "보건소건 민간병원이건 백신 사업 자체는 공공의료 행위이므로 보건소만 접종료를 턱없이 낮추는 것은 일종의 불공정 거래"라며 "민간 병의원에서 접종하는 우선접종대상자의 경우도 국가가 지원을 통해 보건소 수준의 접종료로 접종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해 되풀이되고 있는 보건소로의 접종대상자 몰림 현상도 접종기관이 보건소와 민간 병의원으로 다양화되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란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