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박사의 클래식음악산책]<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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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7.0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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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마에스트로·피아니스트·평화운동가 바렌보임(1부)

▲ 이종구(이종구 심장클리닉원장, 예술의 전당 후원원장)

번스타인과 카라얀 이후 현재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메타, 마리스 얀손스, 라카르도 무티, 사이몬 래틀 등 수많은 지휘자들이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으나 다니엘바렌보임 만큼 화제가 되고 있는 마에스트로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와 마에스트로일 뿐만 아니라 1967년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영국의 미녀 첼리스트 쟈클린 뒤 프레와 결혼함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그 후 그녀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다발성마비라는 불치병에 걸려 연주를 중단하게 되고 42세에 세상을 떠나자 쟈클린에게 세계의 동정이 쏠리고 동거여인이 있었던 바렌보임에게는 차가운 눈초리가 쏠리게 되었다.

그러나 바렌보임이 그 어느 음악인보다도 세계의 화제꺼리가 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유태인이자 이스라엘의 국민으로서 이스라엘의 대 팔레스타인 강경 외교정책을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및 아랍 젊은이들로 구성된 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음악을 통해 이스라엘과 아랍세계의 상호 이해와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위해 용감히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바렌보임은 1942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으나 1952년에 부모와 함께 모든 유태인의 조국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12살의 나이에 지휘지도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식음악학원을 졸업하지는 않았다. 1952년 그는 비엔나와 로마에서 피아노 데뷔를 하였으며 1957년에는 마에스트로 스토코푸스키가 지휘하는 뉴욕 필에 데뷔하였다.

1966년 크리스마스 때 영국최고의 천재적 첼리스트 쟈클린 뒤 프레를 만나고 이스라엘에서 결혼을 했는데 이때 바렌보임의 친구인 주빈메타가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유태인 행세를 하면서 들러리를 서준 해프닝도 있었다. 그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쟈클린이 이스라엘의 유태인과 결혼하자 많은 영국인들은 부러워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들은 클라라와 로버트 슈만 이후 최고의 음악인의 사랑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당시 가장 유명한 음악인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바렌보임은 1967년에 런던필하모니와 지휘자로 데뷔를 하였으며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재능을 보이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사랑스러운 쟈클린의 연주를 지휘하는 바렌보임의 모습은 지금도 DVD를 통해 즐겨 볼 수 있다.

쟈클린 뒤 프레는 1962년 17살에 BBC오케스트라와 엘가 첼로 협주곡 E 단조로 데뷔하였다. 이때 영국의 신문들은 쟈클린은 영국에서 300년 만에 나온 천재적 음악연주자라고 극찬하였다. 그 당시 영국은 독일과 프랑스에 비해 내놓을 만한 작곡가가 없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영국인과 언론계는 쟈클린의 등장으로 엘가와 쟈클린을 국가적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1973년 28살의 나이에 쟈클린은 손가락의 감각을 잃기 시작하였으며 곧 공연을 포기할 수밖에 없어 첼로교사가 되고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되었다. 다발성마비란 전신의 신경과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하고 궁극적으로 호흡이 불가능해져 사망하는 비참한 질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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