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존엄사
연명치료로 인해 환자는 고통 속에 죽음의 과정을 연장해야 하고,
이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은 정신적인 고통과 함께 막대한 의료비
문제로 경제적·사회적·심리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3차 의료기관의 병상을 차지하고 있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환자들로
인해 정작 급하게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들이 신속한 입원치료를 받지
못한 채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가 병을 키우기도 한다. |
미국과 유럽의 존엄사
1960~1970년대에 걸쳐 미국의 인권운동이 퍼짐에 따라, '존엄사'와 '죽을 권리'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우리가 잘 아는 '카렌재판'이다. 1975년 4월 식물인간인 20대 여성 카렌의 부모는 딸의 인공호흡기제거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며 드디어 1978년 3월 뉴저지주 최고재판부는 부모의 요구를 승인하게 되어, 그 여파로 '존엄사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확장되었던 것이다. 같은 해(1978년) 9월에 미국캘리포니아에서 처음으로 자연사법안(Natural Death Act)이 통과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생전유언이 법제화됐다. 그 후 잇따라 미국 전체에 파급돼, 현재 50개주와 수도워싱턴에서 생전유언이 법제화됐으며, 그에 따른 연명치료 중단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만일 생전유언이 없을 경우는 첨부한 지도<그림>에서 보듯, 대다수 주(지도의 붉은 색)에서는 환자의 배우자에게 결정권을 주고 있으며, 3개주(곤색)는 배우자와 부모에게 동등한 권한을 주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생전유언에 관한 정책은 각주마다 제각각 정하고 있으나, 1991년 연방의회에서 법제화한 환자자결법안(Patient Self-Determination Act)을 지켜야만 한다. 이 법안은 메디케어(노인보험)와 메디케이드(빈민보험) 등 연방정부의 공공의료보험혜택을 받고 있는 병원기관(실질적으로 모든 병원과 양로원과 재활원 등)에게, 임종·케어를 포함한 치료의 선택권과 결정권이 환자자신에 있다는 것과 생전유언준비를 모든 입원환자에게 통고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의료시설인정 합동조사위원회(JCAHO)에서도 인준 받은 모든 병원기관은 환자차트에 임종시 'Do Not Resuscitate'(소생술을 시행 않음) 여부를 반드시 기재하도록 했다. 환자자결법안과 JCAHO 규제에 따라 입원환자는 자동적으로 의료지시(Advance Directive)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80%는 생전유언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나, 실제로 이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전체인구의 15~20%(65세 이상 노인은 55%)에 불과하다. 미국의사회(AMA)와 정부는 모든 일반국민에게 평소 의료지시를 갖추도록 적극 권유하고 있으며, 여기에 의사들의 역할이 크게 기대되고 있다. 환자에게 존엄사와 의료지시 등 막연한 용어를 더욱 자세히 설명해 주고 주지시켜야 하며, 모든 환자가 종말에 가서 존엄성을 갖고 죽을 수 있는 자신의 결정권을 행사하게 도와주는 일이 의사의 의무다.
유럽에서는 1979년 서독의 의사회에서 '소극적 안락사 가이드라인 발표'가 시발점이 되어, 현재 전 유럽에서는 존엄사가 법적 또는 관례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2000년 11월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법이 법제화됐을 당시, 교황청과 더불어 가장 먼저 반대성명을 낸 나라가 서독정부다. 과거 독일의 '나치 안락사'의 악몽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존엄사가 유럽과 미국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전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배경은 '보람 있는 삶'(QOL)을 강조했던 고대 로마 희랍사람의 사상과,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인위적으로 연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기독교 종교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계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 할 가톨릭 로마 교황청은 1980년 5월 5일 '안락사에 관한 선언문(Declaration on Euthanasia)'을 발표하고, 치료 불가능한 환자에의 치료중단을 인정했다. 이 선언문은 서론과 결론이외에 ▲인간생명의 가치 ▲안락사 ▲기독교인에게 수난(고통)의 의미와 진통제 사용 문제 ▲의료시행의 정당한 부분(Due Proportion in the use of Remedies)의 4부로 돼 있다. 제4부 존엄사에 관한 해설에는 "모든 치료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죽음이 임박했을 때는…무익하고 부담스러운 연명만을 위한 치료를 양심에 의해서 거부하는 결정이 허용된다. 이러한 경우 의사들은 환자를 돕지 못한다고 뉘우칠 이유가 없다"고 정리했다. 이러한 교황청 성명 내용은 하루아침에 작성한 글이 아니며, 죽음과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존엄성 문제에 대해 몇 십 년 간 성경을 연구하고 조사한 사려 깊은 교시다.
미국 개신교에서도 오래 전부터 존엄사를 지지해 왔다. 1983년 개신교의 중도파인 Lutheran Church in America에서는 생명종말결정에 관한 메시지(A Message on End-of-Life-Decision)를 발표했다. 생명종말결정의 결론은 "의학치료는 경우에 따라 제한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한 죽음은 허용된다…치료에 있어서 판단능력이 있는 환자자신의 결정권이 가장 중요하며, 의사가 추천하는 치료라 할지라도 치료효과보다 위험이 더 크다고 믿을 경우는 치료거부를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연명의료에 관한 AMA 정책은 다음과 같다. ▲환자는 의료문제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으며, 치료거절결과가 죽음을 의미해도 거절을 할 수 있다 ▲연명의료시행은 의학적 혜택을 동반해야 하며, 환자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일단 시작된 의료라 할지도 환자의 요구가 있으면 중단할 일이다. 환자를 대신해서 환자대리인(배우자 등)이나 법원결정으로도 치료중단을 요구할 수 있다 ▲환자자신이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생전유언이나 의료지시가 없을 때는, 환자의 바라는 바에 대한 논의가 생길 것이다. 이럴 경우는 항상 환자의 권리와 존엄성을 우선해서 결정해야 한다.
세계의사회(WMA)는 2003년 9월 헬싱키총회에서 제정한 '생전유서'에 관한 성명에서 "환자가 정당하게 작성한 의료지시(Advance Directive)는 존중되어야 한다", "의료지시가 없을 경우, 의사는 자신이 환자에게 최선이라고 믿는 의료를 제공해야 한다" 등을 권고했다.
이상과 같이 미국과 유럽 등 선진사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존엄사(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가 허용되고 있다.
일본의 존엄사
존엄사란 말은 미국의 'Death with Dignity'와는 뜻이 다르고 따라서 영어번역이 아니며, '연명치료 중단'을 뜻하는 일본어 조어이다. 1976년 '일본안락사협회'가 발족되었으나 실제 그들이 추진하는 운동이 '연명 치료의 중단'이므로, 1983년에 '일본존엄사협회'로 개칭했다. 그리고 1992년 일본의사협회에서 정식으로 존엄사를 인정했으며, 협회조사에 의하면 의사들의 94%가 존엄사를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학술인의 모임 '일본학술회의'에서도 1994년 존엄사 허용에 대해 합의했다. 2007년에 들어와서 존엄사의 법제화를 시도하는 일본존엄사협회는 그들 연구팀의 보고서를 작성한바 있는데, 그 가운데 치료중지요건으로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중지할 의사가 있다 ▲2명의 의사의견이 일치한다 ▲존엄스런 생의 확보와 고통제거를 목적으로 한다 등 3가지를 명시했다. 원래 일본인의 바람직한 죽음은 불교(그들 전통종교)의 젠(Zen, 禪)에서 말하는 '자연사'이지만, 실제로 대다수 일본인은 다른 선진국인과 다름없이 병원에서 죽는다. 그러나 요미우리신문에 의하면 약 50%는 집에서 죽기를 원하고 있다.
2006년 일본 가톨릭협의회 대변인은 "안락사는 인정할 수 없으나, 과도한 연명 조치 거절은 허용한다"고 했으며, 기독교단 총회장은 "성서에서 적극적 안락사는 인정치 않고 있는 반면, 임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자연사에 맡기는 일이 결코 하나님 율법에 배반되지 않으며, 환자의 사전지시는 존중돼야 한다"고 했다.
종말환자에게 존엄사를 인정하고자 하는 일본의 초당파 국회의원들 모임인 '존엄사 법제화를 위한 의원연맹'은 2007년 6월 7일 '존엄사 법안요안'을 공표했다. 내용은 존엄사협회 것과 대동소이나, 의식불명환자는 대상에서 제하며 의식 있는 환자도 본인의사와 함께 가족의 동의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치료중지에 관여한 의사는 반드시 서면기록을 남겨야 할 의무가 있으며, 만일 위반했을 경우는 50만 원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최근 일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종말의료' 사건들은 모두가 안락사와 관련된 사건이고, 존엄사는 일본사회에서 관례적으로 허용된 것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