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박사의 클래식음악산책]<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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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8.20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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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장벽에 금을 낸 밴 클라이번(1934 ~ )<1부>

▲ 이종구(이종구 심장클리닉원장·예술의 전당 후원회장)

번스타인 외에 미국의 자존심을 살려준 미국의 아들 음악인이 또 하나있다. 그는 19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밴 클라이번이다.

그는 1934년에 유전과 축산업의 본고장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전산업가였으며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다.

1958년은 구 소련과 미국의 냉전 절정기였으며 러시아와 미국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하기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다.

이 콩쿠르가 열리기전에 소련은 스프트닉을 우주로 발사했으며 세계는 핵전쟁의 검은 구름으로 덮여있을 때였다. 그리하여 4년마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이 콩쿠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세계의 문화적 우월성을 겨루는 하나의 전쟁터이기도 했다.

이 콩쿠르에서 26세의 젊은 클라이번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콘첼르트 1번의 4악장과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였으며 심사위원들은 클라이번이 최고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소련의 적국이나 다름없는 미국인 클라이번에게 금상을 주는 것은 소련 공산당의 쿠르스초프 서기의 승인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심사위원들이 쿠르스초프 서기장의 의견을 묻자 그는 "그 미국인이 정말로 최고냐?"라고 묻고 그렇다면 그에게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이때 쇼스타코비치가 클라이번에게 시상을 하고 쿠르스초프가 클라이번과 같이 사진을 찍으며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서방언론은 클라이번이 처음으로 철의 장벽에 금을 냈다고 평가 하였다.

클라이번이 우승을 하고 귀국하자 클래식 음악의 애호가뿐만 아니라 온 미국인은 열광하였고 그는 미국의 영웅으로 탄생하였다. 시카고의 엘비스 프레슬리 클럽은 그 이름을 클라이번 클럽으로 바꾸었을 정도였다.

그 후 클라이번이 쿠르스초프에게 직접 부탁하여 자기의 연주를 지휘했던 러시아 지휘자가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클라이번은 쿠르스초프의 초청을 받고 러시아를 다시 방문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연주를 하였다.

클라이번은 하루에 몇 시간씩 어머니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으며 4살 때 악보를 완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7세까지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그 후 줄리아드 음대에서 피아노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거기서 러시아 출신의 여자 레빈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줄리아드 음대의 카페테리아에서 클라이번은 아주 인기 있는 학생이었으며 여기서 흑인 오페라 가수 레온타인 프라이스와 좋은 친구가 되기도 했다. 클라이번은 모임에 늦게 나타나기로 유명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동창생들은 그가 언젠가는 대 스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졸업사진을 촬영할 때도 늦었는데 친구들은 그가 나타날 때까지 30분을 기다려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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