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100년... 질곡을 넘어 새 시대로]
의협 뇌사판정·장기이식 기관 인준(1993)
1993년 3월 4일 의협은 '뇌사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고 같은 해 5월 3일 뇌사판정이 가능한 의료기관 22곳과 장기이식 의료기관 17곳을 인준해 발표했다. 뇌사에 대한 법률이 입법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뇌사를 의학적으로 공식 인정한 계기였다. 이미 뇌사판정 및 뇌사자 장기이식이 일부 의료기관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이를 정부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민들의 공감대가 어느 정도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 논의의 시발점은 1988년 일부 학회와 의료기관이 뇌사에 관한 입법 제정을 의협에 건의하면서 비롯됐다. 이후 의협은 5년에 걸쳐 여러 차례 공청회·자문회의를 개최, 선언 선포 및 의료기관 인준이란 결과물을 창출해 낼 수 있었다. 2000년 2월 9일부터는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라 뇌사가 법적으로 공식 인정됐고 2월 15일 인천 길병원에서 국내 최초로 뇌사를 공인받은 30대 남자의 장기적출 수술이 이루어졌다.
한약분쟁 발발(1993)
1993년 3월 5일 '약국에는 재래식 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두어 이를 청결히 관리해야 한다'는 내용의 약사법 시행 규칙이 삭제되면서 한약분쟁이 촉발됐다. 이전에도 한의사들은 약사의 한약조제 금지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지만 약사회의 반발로 단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규칙이 약사의 한약조제를 금지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한의사들은 약사의 한약조제를 보장하는 조치라며 강력 반발했다. 반발은 한의사와 한의대생들의 시위, 수업거부 등으로 이어졌다. 약사회도 가만 있지 않고 한약조제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사태는 5월말 한의대생 집단유급 사태로 번지다가 이후 면허증 반납·집단 폐업·보사부 차관 경질·한의대생 유급 확정 등 사회적 파문을 낳았다. 한약분쟁은 경실련 등 시민단체의 조정안이 대폭 수용된 약사법 개정안이 12월 17일 국회를 통과하면서 일단락 됐다.
의협 인공수태윤리 선언 선포(1993)
1993년 5월 6일 의협은 '인공수태시술지침'을 제정하고 이를 엄격히 준수하도록 하는 '인공수태윤리에 관한 선언'을 공포했다. 우리나라 가임연령 부부의 10∼15%가 불임증환자이며, 의학적 발전으로 다양한 인공수정과 체외수정 및 배아이식 등 시술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 배경이 됐다. 의협은 이런 시술에 있어 생명의 존엄성 및 절대적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해 짐에 따라 윤리 선언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선언은 '인공수태와 관련된 과정에서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생명의 존엄성과 절대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과 '시술을 시행하려는 의료기관은 의협이 제정한 관련 요건을 갖추고 그 시술 내용을 보고토록 한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의협 정보통신망 개설(1993)
1993년 10월 4일 의협은 최초의 통신망(kmain)을 개설했다. 회원들의 단합을 유도하고 쏟아지는 의학정보를 검색·교환·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의협 특별위원회의 하나인 의학정보연구위원회가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위원회는 통신망 개설을 계기로 모든 의학정보의 기본이 되는 정보기능 표준화 작업도 추진하기로 했다. 'kmain'은 이 후 1996년 11월 2일 인터넷 의협 홈페이지(www.kma.org)의 개통으로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의료보험급여비 환수조항 시비 매듭(1993)
의협의 지속적 노력끝에 1993년 12월 13일 의료보험법 개정안 중 '급여비 환수조항'이 마련됐다. 이 법안은 의료보험료 체납자의 보험급여비를 요양기관에서 환수한다는 조항을 보험자가 체납자 본인에게 진료비 전액을 징수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로써 의료계의 원성을 샀던 부당 보험급여 비용 환수시비가 일단락 됐다. 진료비 부당환수문제는 1991년 7월 1일자로 개정된 급여기준에서 비롯돼 같은 해 10월 전국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의협은 이 조항의 삭제를 지속적으로 건의해왔으며 1993년에는 최우선 과제로 삼기도 했다. 전면 삭제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의협과 병협, 의사 국회의원들의 활약에 힘입어 의료기관에 대한 부당한 환수조치를 철폐하는 데 성공했다.
의료분쟁조정법 국무회의 의결 후 폐기(1994)
1988년 의협이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을 건의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던 '의료분쟁조정법안'이 1994년 11월 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당시 의협은 법안에 의료계가 주장하고 있는 쟁점사항들이 어느정도 반영됐으나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내포돼 있다며 수정을 강력히 요청했다. '의료사고 발생시 그 의료행위가 불가피하고 의료인의 중대한 과실이 없을 경우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는 법안의 내용에서 '형을 면제받도록' 규정해 달라는 것이 주요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국회로 넘어간 이 법안은 거듭 논쟁을 일으키다가 '무과실 보상제도 미도입'에 따른 의료계의 반대로 입법에 난항을 겪었다. 1996년 2월 제14대 국회의 회기만료로 법안은 자동폐기 됐다.
'대한의사협회'로 개칭(1995)
의협은 1995년 4월 28일 대의원총회 본회의에서 협회의 명칭을 '대한의학협회'에서 '대한의사협회'로 개칭하기로 결정했다. 명칭개정 논의는 매년 대의원회에 상정돼 왔으나 본회의에서 성원미달로 번번히 통과되지 못했었다. 이 날 대의원들은 234대 2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명칭 개정안을 확정지었다.
의협 새 휘장 및 표어 탄생(1996)
의협은 1995년 10월 9일 제55차 상임이사회에서 새휘장과 표어를 심사하기 위해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또 1996년 4월 4일 상임이사회에서 새휘장과 표어를 결정, 같은해 4월 27일 대의원총회에서 새휘장과 표어를 공표했다.
1995년 6월 휘장과 표어를 새로 결정키로 하고 공모를 한 결과 휘장은 16명이 27점을 응모하고, 표어는 37명이 74점을 제출했다.
휘장은 5차례의 전시와 공람을 통해 심사해 이원재(포디텔광고회사 근무)씨 작품을 당선작으로, 김병로(서울녹십자의원 원장)씨의 작품을 가작으로 선정했다. 표어는 '국민건강 수호하는 대한의사협회'를 당선작으로, '환자를 내몸같이 국민을 가족같이'를 가작으로 선정했다.
의협 휘장은 총 4번 바뀌었는데, 첫번째는 1947년 10월 31일 대의원총회에서 결정해 1964년 4월까지 사용했으며, 두번째는 1964년 5월부터 사용해 1973년 4월까지 사용됐다.
그 다음은 1973년 4월~1996년 4월까지 약 23년을 사용했으며, 1996년 4월 새 휘장이 공표된 이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의학정보·의료서비스 인터넷으로 제공(1996)
의협은 1996년 11월 2일 제3차 정보통신망학술대회에서 의협 웹 홈페이지(http://www.kma.org)를 개통했다.
홈페이지 개통은 인터넷에 대한 의학 및 의료분야에서의 활용과 요구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과 관련, 회원과 국민에게 보다 나은 의학정보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300여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서울힐튼호텔에서 열린 개통식은 단순한 홈페이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컴퓨터통신망을 통해 의학 및 의료분야의 올바른 정보를 알릴 수 있게 됐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홈페이지는 국내 의사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동료들이 함께 쓸 수 있는 게시판이 있고, 대화실·자료실은 물론 회원들이 자신의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도록 구성됐다.
DRG 실시…의료계 강력 반발(1997)
의협과 병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는 1997년 2월 1일 포괄수가제(DRG) 시범사업을 60개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복지부는 1월 15일 포괄수가제 시범기관 지정 신청서를 접수받은 결과 종합병원 22개 등 60개 의료기관이 시범사업에 참여의사를 밝혔다며 예정대로 2월 1일부터 시범사업을 실시할 것을 천명했다.
이와 함께 의료기관의 자발적 참여가 필수라고 지적하고 2단계 시범사업에는 1차시범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기관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를 당부했다.
이에 앞서 의협은 병협과 공동대책위를 구성하고 포괄수가제의 부당성을 적극 주장했다.
의협과 병협은 1996년 12월 정부와 의료계가 합동으로 연구중이던 RBRVS(상대가치개발)가 확정돼 의료보험수가 자체가 현실화될때까지 시범사업을 유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