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이혁 지음/신광출판사 펴냄/1만 8000원
1973년 개봉한 영화 '더 웨이 위 워(The way we were)'(시드니 폴락 감독 바바라 스트라이샌드·로버트 레드포드 주연)는 국내에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주연배우의 나이는 이제 일흔을 앞두거나 이미 넘어버렸고 시드니 폴락 감독은 이태전 세상을 등졌지만 그들과 그들의 영화는 우리 가슴속에 추억으로 남아있다. 가수이기도 했던 바바라 스트라이샌드는 "…그 때는 모든 것이 간단했나/아니면 시간이 흘러 그런 것인가/우리가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면/그렇게 할까, 시작할 수 있을까?…"라고 시간과 인연에 대한 추억을 노래했다.
보통은 나이 마흔만 넘어도 지나온 시간에 대한 기억들이 하나둘 어렴풋해지며 짧은 기억의 한계를 탓하게 된다. 게다가 골칫거리인 일상의 무게는 오히려 삶을 잊기 위해 사는 형국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순간순간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만다. 추억은 기억의 되새김이기도 하지만 남은 시간에게 지나온 시간이 전하는 선물일수도 있는데….
우강 권이혁 서울대 명예교수는 올해도 약속을 지켰다. 2006년 10년동안 맡아온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기에 앞서 <여유작작>을 상재하면서 "퇴임하면 매년 에세이집을 낸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이어와 <온고지신> <마이동풍> <어르신네들이여, 꿈을가집시다>를 지난해까지 선보였다. 올해 다섯번째 에세이집의 주제는 추억이다. 책 이름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자>.
추억에도 희비애락이 있고, 잊고 싶은 기억과 지우고 싶은 시간도 있겠지만 기억할 만한 일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우강 선생은 이 책을 통해 한순간 한순간의 흔적들이 모여 성공과 행복을 품어낸다는 가장 평범한 진리를 잊고 사는 우리에게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한다.
언제나 그렇듯 추억여행의 시작은 학창시절이다. 김포 하성보통학교와 전학해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서대문 죽첨보통학교 시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잊지못할 은사와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고 경성제일고보 때 동급생이던 방일영·박성화·안병훈에 대한 소소한 일상이 소개된다. 대학 때와 의대 교수시절 즐겨 찾았던 대학로 학림다방, 명동 황혼다방 등과 충무로 몇몇 곳의 찻집에 대해서는 그 긴 시간의 터울을 뒤로하며 정겨운 사랑방이었던 현장을 생생하게 옮겨 놓는다. 산아제한정책이 출산장려정책으로 바뀐 것처럼 시대와 사회상황에 따라 우리 땅 곳곳에서 일어난 변화의 바람도 느낄 수 있다.
추억의 돋을새김이 가장 짙은 것은 사람일까?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최규남 전 서울대총장·현승종 전 국무총리·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남덕우 전 국무총리·정원식 전 국무총리·춘봉 장석윤 선생·히노아라 시게아키 박사 등과 얽힌 일화에서는 시간을 넘어서 쌓아온 두터운 정을 내보이며,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도반으로서 그 분들이 전해준 가르침과 배려에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들에는 MC 송해 선생과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장·김연아가 소개된다. 그들의 삶과 행적을 통해 우리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금도 한국아카이브즈포럼 대표·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총재·대통령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등으로 '영원한 현역'인 우강 선생의 열정은 전문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예술행사에도 미친다.
'세계 공연예술 현장기행 전시회'에서는 저널리스트 최정호 교수의 예술에 대한 식견과 깊이에 놀라고, 영화 '워낭소리'에서는 늙은 소와 촌로부부가 전해준 삶과 사랑을 말한다. 연극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서 배우 박정자와 명동예술극장을 추억하며,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명 연출가 임영웅에게 경의를 표한다. 독일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 가족간의 낯설음과 행복을 되뇌이고, 페르난도 보테르·루벤스·클림트 등의 명화에 대한 감흥을 책속에 옮겨 놓는다. 전봉초 선생 7주기 음악회의 감상을 전하고 문국진 박사의 '음악, 법의학자를 만나다' 공연에서는 새로운 영역에 학문적 도전을 게을리하지 않는 문 박사의 노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회자정리'라지만 헤어짐은 언제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우강 선생은 지인이었던 윤경현·성수현·김영옥·한운사·허영섭 녹십자 회장과의 이별을 슬퍼하고 김수환 추기경과의 두번의 짧은 대담 속 긴 여운을 아쉬워한다.
책 갈무리는 여느때처럼 가족에 대한 단상이다. 지난해 말 이승에서의 부부연을 풀고 영면한 아내를 추억한다. 다른 이 돕기를 좋아하고 배려에 인색하지 않았던 아내를 떠올린다. 의식 없는 병상에서지만 언제나 삶의 중심이었던 아내와의 10년이 글 속에 녹아있다. 평생 큰소리 한번 내지 않았던 온유함과 너그러움을 그리워하고 스스럼 없는 부탁조차 들어주지 못했던 선생의 무심함을 탓한다.이 땅에서 아무런 한도 남기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우강 선생의 '아름다운 추억'은 여기서 마무리되지만 지금도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는 선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주고' '받고'를 되풀이하는 삶 속에서 할 수 있는대로 많은 경험과 노력을 통해 추억을 만들어가라는 당부도 전한다. "모든 추억은 아름답기에…".
책 중에는 '춘한노건(春寒老健)'과 '기이지수(期頥之壽 )'라는 말이 나온다. 춘한노건은 '봄 추위와 늙은 사람의 건강'이라는 뜻으로 '사물이 오래가지 못함'을 이르고, 기이지수는 100세를 뜻한다.
미수(米壽)를 맞은 우강 선생께서 '늙은 사람의 건강'도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시고, 구순·망백(望百)을 지나 백수(白壽)와 기이지수까지도 <여유작작>으로 비롯된 약속을 이어가실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02-925-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