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의료정책 심포지엄' 특별강연발표에 대한 소감
일본의 건강보장50주년 기념 의료정책심포지엄은 일본의사회의 대강당에 500명이상의 의료계 지도자들이 운집하여 입추의 여지가 없는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한국의료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의 특별강연은 큰 의미가 있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한일간 의료제도 특히 건강보험이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보면서 상호간의 특색을 비교하여 본 점도 흥미로웠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내용이었다고 평가한다.
일본은 50년전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비약할 당시에 건강보험제도를 도입했고 시장경제에 입각하여 제도를 정착·발전시켜 나갔다.
또 안전하고 합리적인 제도 운영을 위해 북유럽 여러 나라와 같은 '고부담·고급여' 보다는 '중부담·중급여'를 근간으로 하고 조합주의 원칙을 고수해 온 것이 특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30년 전, 1인당 국민소득이 미화 1000달러에 불과하던 시대에 재정적인 취약함 속에서도 건강보험제도를 도입, 이후 12년 만에 전국민건강보험제도를 달성했다. 이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성과라고 할 것이다.
한국이 처음부터 저부담·저급여를 근간으로 한 것은 당시의 재정적 취약성을 감안할 때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는 초창기부터 본인부담제도의 활용, 급여제한, 비급여 제도 활용 등으로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피보험자의 본인부담이 높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보장성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동기가 크게 작용하게 되어 저부담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급여는 빠르게 늘어나는 소위 복지 포퓰리즘의 경향을 띄게 된 점은 우려스럽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재정위기가 초래 된 것도 부인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고령화 사회가 도래하고 국민연금·산재보험 등 선진국형 복지제도가 도입되면서 재정 부담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한일 양국 모두에게 건강보험의 안정적인 재정 운영은 제도의 지속과 발전을 위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이슈일 것이다.
한일간 의료제도의 또다른 특색은 일본은 조합주의를 고수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그 당시 국회의 지나친 개입으로 인해 통합주의체제로 제도가 변경되었다는 점이다.
통합주의는 재정적으로 대규모의 풀링(pooling)이 가능하고 피보험자간 불균형 해소의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건강보험단체의 지나친 지배 구조와 관리 운영상의 미숙과 낭비적 요소라는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보험자 단체에 의한 의료보험 수가의 일방적인 압박 등이 우리나라의 특징이다.
일본의 수가 결정 과정을 보면 보험제도에 관한 전문가 등으로 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공급자에 대한 일방적인 반대라는 분명한 목적과 동기를 가진 일부 시민 단체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외에 우리나라 제도의 장점으로는 청구 및 심사의 전산화(청구: 99%, 심사: 55%)를 통해 인원, 비용면에서의 의료비를 절감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특별강연에 이어 일본측에서 대학교수와 언론인 등이 강연자로 나서 여러 가지 이슈들을 제기하고 토론했는데 그중 여러분이 주목할 만한 과제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1. 일본의 의사부족에 대한 대책
약 15년 전, 당시 일본 정부의 의료담당 국장이 "의료비 지출이 계속 증가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망언을 발표했는데 이 발언은 심각한 파장을 몰고 왔고, 의사를 압박하는 각종 정책들로 이어져 결국 오늘날 일본이 겪고 있는 의사부족 문제를 야기한 원흉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의사 부족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하나로서 제기되고 있는 의과대학 증설 문제에 대해 일본의사회 현재로서는 찬성하지 않고 있으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각도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였다.
" 한국에서도 의사의 적정수에 관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 의과대학 증설이 급격하게 이루어져 현재 41개 대학으로 늘어났으며, 매년 3000명의 의사가 새로 배출되고 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10년, 15년의 세월이 필요한 데 이러한 추세를 기준으로 하면 한국도 의사과잉상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사회 여러 회원국의 상황을 살펴 보면 의사가 부족한 나라도 있는데 이는 대체로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의사과잉의 나라도 있는데, 예를 들어 남미의 어느 나라에서는 당시의 대통령이 노동자들의 자식도 의사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급격한 의사 양성을 추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의사과잉상태가 되어 의과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불가능해져서 택시운전기사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무분별한 의사 양성 정책은 이런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 전문과목과 지역에 있어서의 의사수급 불균형 문제
도시의 인구집중 현상도 인위적으로 조정하기 어렵다. 전문과목과 지역지역에 있어서의 의사수급 불균형 문제도 시정하기가 쉽지 않다.
EU의 어느 국가에서 의사의 지역 배치 문제에 대해 의사들에게 강제하지 않고 권고하는 것을 통해 지역 균등 배치를 도모한 예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성과가 거두었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자유사회, 시장경제체제하에서는 정부에서 의사 교육에 필요한 교육비를 부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강압적인 방법으로 지역의 배치를 좌지우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정부가 해야할 일은 의료에 대한 적절하고도 충분한 투자, 의사의 직업적인 환경의 보호(예, 의료분쟁의 합리적 조정 등)가 급선무라고 할 수 있다.
3. 의료인력간 권한 이양 문제
의사가 부족할 경우, 그 기능과 권한의 일부를 타직종에게 이양하거나 분담하게 하는 방안을 주장하는 나라들이 있는데 아시아권에서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수만명의 임상 간호사가 준의사역할을 하고 있으며 영국에서도 비슷한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국에서는 의료비가 천정부지로 상승하고 있고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에 대해서는 절대로 동의 할 수도 없고 이런 방안이 확대되면 의사가 되고자 하는 희망자가 줄어들 수 있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의료계의 많은 지도자들이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지식을 공유하고 협력하여 해결책을 찾아가야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의사회 부속 총합정책연구소의 기능과 역할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노력 없이 성과가 있을 수 없고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이 의사들의 앞날을 열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1980년도부터 WHO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건강'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제적인 노력을 기울이자는 캠페인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WHO 총회에서 한국을 대표하여 연설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WHO의 구호는 참으로 좋고 아름답지만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 가능한 방안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모든 사람에게 건강'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정책은 모든 나라에게 전국민건강보험제도를 실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세계의 여러 빈곤국이 있는데 국민들이 연간 미화 1~10달러 정도의 의료비 밖에 지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불과 미화 1000달러 밖에 안되던 상태에서도 건강보험을 성공적으로 도입하고 정착시킨 경험은 여러 빈곤국에게 참고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국제적인 경제지원이 수반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믿는다. 빈곤국에서도 그 사회에 맞는 모델을 도출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런 실천 가능한 방법을 연구 도출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