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노력 23년 결실...형사처벌특례·무과실 보상 채택
의료사고 발생시 환자에게는 신속하고 적절한 보상을, 의료인에게는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조성토록 하기 위한 '의료분쟁조정법'이 드디어 국내에 도입됐다.
의협이 지난 1988년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을 정부와 국회에 건의한 이후 23년만의 일이다. 의료분쟁의 합리적 조정 및 보상 절차가 마련됨에 따라 앞으로 의료소송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의료사고가 주로 발생하는 외과계열 기피 등 의료왜곡 현상 등이 크게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의료분쟁조정법은 지난해 초 국회통과를 눈 앞에 두고 좌절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국회 소관 위원회인 보건복지위원회를 거쳐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원회 의결까지 이뤄졌으나, 전체회의에서 무과실의료사고 보상 등 쟁점에 대한 이견차를 극복하지 못한채 결국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하고 법사위 산하 소위원회로 되돌려졌다.
이 같은 진통을 겪고 탄생한 만큼 의료분쟁조정법에 대한 의료계와 국민의 기대는 크다. 이르면 내년 초부터 발효되는 법률의 주요 내용과 의미을 살펴본다.
형사처벌특례 도입 '큰 진전'
국회는 11일 본회의를 열고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이하 의료분쟁조정법)을 제적인원 233명 중 찬성이 222명, 반대 1명, 기권 9명으로 통과시켰다.
법률의 핵심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설립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에 대한 국가의 무과실 보상(무과실 의료사고 보상) △업무상과실치상죄에 대한 반의사불벌 적용(형사처벌특례) △손해배상 대불제도 △의료배상공제조합 설치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형사처벌특례제도를 도입한 부분이다. 법률은 의료사고로 인해 형법상 업무상과실치상죄를 범한 보건의료인에 대해 의료분쟁조정 절차에 따라 조정이 성립되거나 합의가 이뤄진 경우,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했다.
의료행위의 속성상 위험성이 항상 존재하고 의료법상 의료인의 진료거부가 금지돼 있는 현실 속에서 의료인의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조성하고 조정 절차에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취지다. 단 법률은 '피해자가 신체 상해로 인해 생명에 대한 위험이 발생하거나, 장애 또는 불치·난치의 질병에 이르게 된 경우'에는 형사처벌특례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는 중과실치상죄에 대한 국민의 법감정을 고려한 것으로서, 특히 2009년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법사위 관계자는 "형사처벌특례는 조정성립 등 당사자의 합의 및 완전한 손해배상과 피해자의 처벌불원의사를 전제로 한 것"이라며 "이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 보다 피해자 보호에 철저를 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서 조항이 붙긴 했지만 의료사고에 대한 형사처벌특례의 대원칙이 법률에 명시된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는게 의료계의 분위기다. 지금까지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과실의 정도나 사고의 정황 등에 대한 고려 없이 형사 사건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의료인의 진료행위 위축, 방어진료 경향 등 진료 왜곡현상이 초래돼왔다.
이같은 현실은 사고 위험이 많은 산부인과·흉부외과 등 외과계열 전공의 기피 행태로 이어져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과실 의료사고 보상 도입
보건의료인이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 의료사고에 대해 환자의 손해를 보상토록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이는 누구에게나 발생 가능한 위험을 사회적으로 분산하려는 사회보장 차원의 제도로서, 이미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 채택하고 있다. 스웨덴·뉴질랜드의 경우 모든 의료사고에 대해 적용하고 있으며 미국은 버지니아·플로리다주에서, 일본은 출산관련 신경손상의 경우 도입하고 있다.
이번에 마련된 의료분쟁조정법은 '분만에 따른 의료사고'에 대해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보상하도록 규정했다. 보상 재원은 보건복지부와 의료기관 개설자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주체가 분담한다. 단 무과실 의료사고 보상 제도는 법률 공포 후 2년 뒤로 시행을 유예했다.
앞으로 하위법령에서 마련될 재원의 분담비율, 보상의 범위 등 세부 사항을 둘러싼 심도 깊은 논의가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입증책임 의료인에 전가 '미반영'
그동안 의료분쟁조정법 논의 과정에서 가장 큰 논란은 의료사고 입증 책임의 주체를 의료인에게 전가하는 '입증책임 전환' 도입 여부였다. 이는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강력히 요구됐던 것으로서 '보건의료인이 의료사고에 관해 주의의무를 다하고 보건의료기관의 시설·장비 및 인력의 흠이 없음을 증명한 경우'에 한해 의료사고배상책임을 면제토록 하는 제도다.
그러나 의료계는 이같은 입증책임 전환이 과실책임의 일반원칙인 '원고입증책임주의'에 반하고, 산부인과 등 의료사고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는 진료과목의 기피현상을 초래한다며 강하게 반발해 왔다. 따라서 이번에 제정된 의료분쟁조정법은 이 같은 의료계의 입장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환자측이 의료인의 과실을 증명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문제를 고려해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의료사고 감정기구를 설치, 의료사고 과실유무를 조사토록 보완했다.
신속한 구제...환자측에 큰 도움
시민단체에 따르면 의료소송의 평균 소송 기간은 약 26.3개월로 일반 소송 보다 4배 이상 길다. 또 항소율이 70%가 넘어 환자와 의사 모두 장기간의 소송에 극심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의료분쟁조정법은 조정신청이 있는 날로부터 90일 이내에 손해배상액을 결정토록 명시함으로써 '신속한 구제'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손해배상금 대불제도'를 도입, 의료기관이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경우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요양기관에 지급해야 할 요양급여비용의 일부를 조정중재원에 지급함으로써 신속한 배상이 이뤄지도록 했다.
의료분쟁조정법을 발의한 3명의 의원(한나라당 심재철·민주당 박은수) 가운데 한 명인 민주당 최영희 의원은 "100%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동안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심리적 고통과 소송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낭비를 다소나마 줄일 수 있는 제도가 될 것"이라며 "법 시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과 한계는 지속적으로 보완해 의료사고로 인한 국민의 피해가 최소화 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협 노력 결실...역사 한 획 긋는 성과
의협은 지금까지 의료분쟁조정법 제정을 의료계의 숙원사업으로 설정하고 의료계 입장을 국회와 정부 등에 적극 전달해 왔다. 1988년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을 건의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의료피해 보상구제법안'을 정부에 입법 청원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 1994년 의료분쟁조정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입법 가능성을 처음으로 열었다. 이후 1997년과 1998년, 2002년·2005년 등 국회 차수가 바뀔 때마다 국회 토론회·공청회·간담회 등에서 의료분쟁 조정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문정림 의협 대변인은 의료분쟁조정법의 국회 통과에 대해 "의료사고와 관련된 환자와 의료인 사이의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차와 기준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는 점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문 대변인은 "의료분쟁조정법은 환자와 의료인, 모두의 숙원이었다"며 "앞으로 환자에게는 신속하고 적절한 보상이, 의료인에게는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조성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또 "국회를 통과한 법률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의료계와 국민 모두 다소의 불만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그러나 법적 토대가 세워진 만큼 앞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개선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