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가는 병, 오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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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1.09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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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 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세월 따라 질병의 양상도 변한다.

한때는 그 위력이 대단하여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질환도 세월이 지나면서 세력이 점차 약화되거나 아예 사라진다. 반면에 예전에는 없었거나 몰랐던 질환이 근래에 새로 나타나 건강을 위협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크게는 천재지변을 동반한 자연환경이나 전쟁의 결과로, 작게는 생활환경이나 습성의 변화 때문이다.

우리나라 질병의 변천을 보면 해방 전에는 감염병과 영양결핍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결핵·한센병·기생충·말라리아가 국민건강을 위협했다. 그러다 경제가 좀 나아져 위생상태가 개선되고, 항생제 출현과 예방접종 실시로 영양실조와 감염성질환은 많이 감소했다.
경제가 어려웠던 1970년대에 힘들게 수련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기억한다.

지금은 거의 보기 힘든 홍역·백일해·디프테리아·소아마비·신생아 파상풍 같은 전염성질환으로 인한 많은 어린이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디프테리아 합병증에 의한 심근염으로 서서히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최후를 목격한 것도 이젠 먼 옛날 일이다.

소아마비를 앓고 생명은 건졌으나 하반신 마비로 일어서지 못하는 아이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절망적인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비위생적인 가정 분만으로 파상풍에 걸린 신생아와 퉁퉁 부은 산모의 얼굴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영양실조로 야맹증·각기병·괴혈병·구루병에 걸린 아이는 성장발육장애를 초래했다.
가난해서 못 먹고 못 먹어 삐쩍 마른 아이얼굴에는 마른 버짐이 사라지지 않았고, 머리에는 기계총, 배는 기생충으로 고생했다. 그때 회충약을 먹고 파란하늘이 노랗게 변한 희한한 경험은 빈곤과 무지에 대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 후 생활환경과 위생상태가 좋아지고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후진국형 질환은 사라지고 새로운 질환이 등장하였다. 이 중에는 그 전에 없었던 병이 아니고 잘 모르고 있다가 의료기기의 발달과 의료기술의 향상으로 발견되거나, 식생활과 생활습관의 변화로 새로 생긴 질병도 있다.

달고 기름진 맛있는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편한 것만 추구하는 본능적 요구로 인체기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런 식습관의 변화로 비만·고혈압·당뇨병 같은 대사성질환이 증가했으며, 공해와 생활환경의 변화로 알레르기질환이 늘었다. 빈곤과 결핍의 질환에서 풍요와 과잉의 질병으로 변하고 있다.

전에는 드물었던 비만아를 요즘 외래에서 흔히 본다. 잘 먹어 영양상태가 좋다고 만족할 일이 아니다. 살찐 아이를 볼 때마다 불안하고 불편해진다. 대개는 초과한 영양섭취와 부족한 운동량이 원인일 것이다. 소아비만이 성인비만이 되고, 성인병 원인이 될 수도 있다니 그냥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영양관리가 중요하고 필요하다.

모든 게 풍성한 요즘, 먹는 것만 넘쳐나는 게 아니다. 병원도 넘치고 의사도 넘쳐난다. 그런대도 한쪽에선 여전히 부족하다 우긴다. 넉넉하다 해서 다 좋은 건 아니다. 모자람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양이 늘면 질이 떨어지기도 한다. 병원과 의사가 늘어난다고 국민건강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의사 수가 부족해도 안 되겠지만 많아도 좋지 않다. 과유불급이라고나 할까. 중용을 따르는 적정선이 유지돼야 한다.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질병뿐만 아니다. 세태가 변하면서 의사들이 선호하는 진료과도 바뀌고 있다. 힘들고 고된 과는 인기가 없다. 리스크가 높고 돈벌이가 안 되는 과를 멀리한다. 가까이서 보면 시류에 편승한 현명한 판단 같으나 멀리서 보면 안타까운 현실이다.

힘든 진료과를 기피하는 요즘 의료현실, 이것도 예사 병이 아니다.
앞으로는 또 어떤 질병이 유행하여 인류를 괴롭힐 것인가.

몇 해 전에 일본 대학생들에게 집단적으로 홍역이 발병하였다는 사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예방접종을 소홀히 하면 전염성 질환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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