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훈정 대한의사협회 감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언어학과 교수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어느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지금부터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날 무렵 학생들에게 묻자 모든 학생들이 다 코끼리를 생각했으며 그것도 교수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랬다는 것이다. 즉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먼저 코끼리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언어적 인식론을 바탕으로 '프레임이론'을 주창했다. 여기서 프레임(frame)이란 사람들이 어떤 이미지나 사회적 의제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본질과 의미, 사건과 사실 사이의 관계를 정하는 직관적 틀을 뜻한다(좀 더 줄여서 표현하자면 '인식의 틀' 정도 되겠다).
프레임이론이 성립하는 이유는 우리가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감각이 우리 두뇌에서 '언어'로 변환되어 수용하기 때문이다. 즉 외부 감각->연관 단어->이미지 연상, 이런 순서를 거치게 되는데 언어를 담당하는 대뇌의 손상을 받은 환자들의 경우 이러한 연상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프레임이론이 적용되는 사례는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일례로 지난 2009년에 있었던 신종플루 사태를 들어보자. 당시 신종플루가 발생되어 뉴스에 보도되었을 때, 언론방송은 처음엔 '돼지인플루엔자'라고 보도했다. 그러자 국민들은 돼지고기의 섭취를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여 돼지고기 판매가 격감했고, 보건당국의 발표에도 이 현상이 사라지지 않자 돼지고기 시식회까지 여는 촌극이 벌어졌다.
반면 미국의 선거전략가 제임스 카빌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유명한 구호로 무명의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을 미국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 전해 걸프전의 승리로 공화당의 조지 뷔 대통령은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지만, 막대한 전쟁비용의 부담으로 인한 재정적자는 물론이고 80년대부터 지속된 무역적자 등으로 미국 경제는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이라고 해서 미국의 경제를 살릴 만한 별 뾰족한 수단이 없었음에도, 선거 구호에 경제를 단도직입적으로 내세워 이슈를 선점함으로써 '공화당 - 경제 실패', '민주당 - 경제 회생' 이라는 이미지를 연상하게 해주었고 결국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렇듯 프레임이 어떻게 짜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사뭇 달라진다. 즉 전략적으로 잘 짠 프레임을 제시하여 대중의 생각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쪽이 정치적으로 승리하며, 이를 반박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프레임을 더욱 강화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1992년 대선에서 공화당은 미국 경제의 어려움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역설했지만, 변명을 하면 할수록 미국 국민들에게 '역시 경제가 어렵구나'하는 인식을 심어주었을 뿐이었다.
변명은 프레임을 강화한다
이제 의료를 보자. 오래 전부터 한국 의료를 비판하는 화두 중 하나는 '3시간 대기, 3분 진료'로 대표되는 박리다매 진료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러한 '저질진료'가 의사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낳고 의료수가 인상에도 저해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보건의료 통계를 보면 그 어디에도 우리 의료의 수준이 '저질'이라는 증거는 없다. OECD Health Data를 보아도 한국의 의료의 수준은 높으며, 저비용 고효율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물론 그 저변에는 우리 의사들의 봉사와 희생이 깔려있다). 한국 의료의 수준이 낮다, 즉 우리 의료가 저질이라고 판정을 받으려면 비슷한 사회경제 수준의 국가들에 비해 평균 수명이 낮다든지 영아사망률이 높다든지 아니면 의료비 지출이 많다든지 하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근거도 없이 의료 행태가 여타 국가들과 다르다고 하여 의료의 질이 높거나 낮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의료서비스의 경우, 즉 친절도나 만족도 등은 계량화하기 어려우므로 논외의 대상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의 의료 행태는 이미 지난 수십 년 간 한국의 현실에 최적화된 것이다. 35년 전 정부가 의료보험을 도입할 때부터 저부담 저급여로 시작한 것이고, 이후 경제가 크게 발전했음에도 국민들은 부담을 늘리기는 것을 꺼리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국민들은 보다 나은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보험료나 세금 등의 부담을 더 늘려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의료제도에 익숙해져 있기에 부담을 더 늘리는 것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는 현재의 한국 의료의 질이 나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 의료의 질이 낮아서 불만이라면 당연히 부담을 더 감수하고라도 질적 향상을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저질의료'를 거론하는 것은 부정적인 프레임에 스스로 갇히는 꼴이다. 지금의 의료 현실이 의사들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 탓이 아니라 잘못 설계된 의료제도, 특히 저부담 저급여 건강보험제도에 기인한 것이고 의사들은 거기에 불가피하게 적응한 것밖에는 없다. 박리다매 진료는 정부가 수가를 현실화하고 의사의 노동 강도를 줄여주는 대신 서비스를 제고시키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저질진료'를 해왔다고 고백하면 국민들은 그것이 잘못된 의료제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라고, 그래서 의료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역시 의사들은 나쁜 사람들이고 정부가 각종 규제를 통해 저질진료를 할 수 없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변명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프레임은 강화될 것이다.
부정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현대의 어떤 이익집단도 스스로 부정적인 프레임에 갇히는 경우는 없다. 택시노조가 파업을 해도 기사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민들도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면 정부는 때가 되면 요금을 좀 올려주고 회사는 거기에 맞춰 월급을 올려주는 식이다. 먼저 노조에서 택시 요금이 낮아서 그동안 기사들이 불친절했고 승차거부나 총알택시 운행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은 바는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긍정적인 프레임을 만들고 주장해나가야 한다. 오히려 대한민국 의료의 수준이 높고 세계 각국에서 우리 의료를 배우려고 난리라는 것을 내세워야 한다. 그러면서 그 배경에는 우수한 한국 의사들과 그들의 봉사, 희생이 있으니 이를 대우해줘야 한다고 해야 한다. 즉 '우수한 한국 의료'라는 프레임을 만들자는 것이다.
고등학교때 보았던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에 이런 장면이 있다.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악마 '고저'가 부활한 뒤, 음흉하게도 주인공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좋겠냐고 묻는다. 주인공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고 외치지만, 그 중 한 명이 마시멜로우를 생각했고 마침내 마시멜로우 괴물이 나타나면서 난동을 부린다(결국은 어찌어찌 처치했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 현실에서 괴물로 나타나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비단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프레임은 스스로를 가두고 파괴할 수 있다. 대한민국 의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저질의료를 해왔다는 자괴감이 아니라 우리가 한국 의료를 발전시켰고 한국 의사가 최고라는 자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