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학이 찾아내는 그림 속 사람의 권리

법의학이 찾아내는 그림 속 사람의 권리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13.08.27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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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진 지음/도서출판 예경 펴냄/2만 5000원

 

예술과 과학은 만날 수 없을까.

예술가들은 영감이 떠오르면 곧바로 작품으로 승화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다. 과학자들은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이론과 실천에 중심을 두며 과학적 사실 이외에는 어떠한 것에도 타협이 없다. 일견 예술과 과학은 결코 융합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예술 작품이 작가의 감성과 직관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시대가 부여하는 목적의식이 반영되고 그에 따른 작가의 철학적 지성이 더해지기도 한다. 대상을 그림으로 좁혀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화가는 예술적인 영감 뿐만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거치고 다양한 분야의 식견을 밑거름삼아 작품을 완성한다. 시대를 증언하는 무언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국내 법의학계의 태두로서 일가를 이뤄온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가 은퇴 이후 천착하고 있는 '법의탐적론(法醫探跡論·Medicolegal Pursuitgraphy)'을 근간으로 미술 작품속에 감춰진 진실에 다가서는 <법의학이 찾아내는 그림 속 사람의 권리>를 펴냈다.

법의탐적론의 목적은 고인이 남겨 놓은 유물이나 문헌 및 작품 등을 마치 시체를 부검하듯이 '문건 부검(Book Autopsy)'을 통해 과학적으로 탐구하면서 진실을 밝혀가는 데 있다.

임상의학이 사람의 생명에 대한 외경이라면 법의학은 인간의 권리를 지킨다.

저자는 평소에도 그림을 보면서 화가의 예술적 기교보다는 시대적 비판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했는가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명화들 가운데 인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표본이 되거나 사람의 권리에 대한 침해를 경고하고 인권 수호를 찬미하는 작품을 마음속에 새겨 놓는다. 결국 이와 같은 새로운 시선은 이 책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밝혀내고, 훼손됐던 누군가의 권리를 회복시킨다.

가장 최근의 핵심적인 연구는 200년 넘게 이어지던 프란시스코 고야 작 <옷을 벗은 마하>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일이다. 지금까지 마하의 모델은 알바공작부인이 유력했다. 당시 가톨릭국가였던 스페인에서 나신을 드러낸 것이 명문가인 알바가문의 후손들에게는 불명예였다. 100년 넘은 무덤을 파헤치고 법의학적 판단을 구하며 명예회복에 나서기도 했지만 결론을 맺지 못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결국 연구결과 실제모델은 당시 재상이던 마누엘 고도이의 애인이었던 페피타로 밝혀졌다. 각기 다른 그림 속에 등장하는 두 인물에 대한 그림얼굴을 랜드마크 비교검사(3차원 형상복원)·얼굴계측지수 비교 검사·얼굴인식프로그램 비교검사·중첩비교검사 등을 통해 밝혀낸 것이다.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 '끝나지 않은 명화사건'에서는 고야 그림의 실제모델을 과학적으로 검증해 가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으며, 이외에도 프리네·채플린·아리스토텔레스·다윗과 밧세바·세례 요한과 관련된 명화속 이야기들과 구르베·휘슬러·들라크루아 등 진실을 향해 꺾이지 않았던 예술혼도 만날 수 있다.

2부 '예술은 어떻게 탄생하는가'에서는 창작의 모티브와 과학적 연계, 예술적 표현에서는 예술가들이 창작의 모티브를 어디서 찾고 그것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창작해내는지를 살핀다. 모티브와 창작의 관계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연계돼 있으며 작품은 어떻게 독특한 상상력과 독창적 기법으로 완성되는지 화가와 명화를 통해 숨겨진 진실을 찾아간다.

마지막 3부 '자화상과 대화하는 법의학자'에서는 화가들의 자화상이 단순히 그림을 그릴 당시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도 있지만, 상당부분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물론 그들이 겪는 정신적·육체적 장애와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까지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자화상 속에서 역사적인 사회상을 들여다보고 예술적 가치만이 아니라 역사적 고증의 가치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되새긴다.

책 속에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324점의 명화가 또다른 볼거리를 이룬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명화집으로 불리워도 손색없다.  

구순을 앞둔 노학자의 예술과 의학의 접점찾기는 계속된다. 40권의 법의학 전문·교양서적은 뒤로하고라도 <모짜르트의 귀> <반고흐 죽음의 비밀> <바흐의 두개골을 열다> <그림으로 보는 신화와 의학> <미술과 범죄> <표정의 심리와 해부> <질병이 탄생시킨 명화> 등 예술과 의학의 만남에 불쏘시개가 되려는 저자의 소망은 벌써 열세번째 책으로 이어진다. 끊이지 않는 열정의 결과물이다.

지금도 '공부'할게 많은 노학자는 눈이 흐려지는 게 아쉬울 뿐이다(☎ 02-396-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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