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숙(대한의사협회 부회장, 한국여자의사회 치기 회장, 김화내과의원)
2013년 7월 말 태양이 식을 줄 모르는 가뭄 속에서 여자대학으로 세계최대 규모인 이화여자대학 캠퍼스에서 세계여자의사회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번 세계 학술대회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모두 39개국에서 1374명이 참석했다.
'그때 그 시절'을 잠시 생각해 본다. 이화여대 정문 앞 광장은 먼지가 풀풀 나고 비가 오노라면 신발이 푹푹 빠지는 질퍽질퍽한 흙탕 바닥이었다. 젖은 발로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만 했던 그 광장은 온데간데 없고 깨끗한 아스팔트로 포장됐다.
오뉴월 뙤약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일회담 반대집회를 외치고, 해마다 눈 부신 5월의 향연과 대관식이 열리던 운동장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추억이 돼 버렸다.
그 자리에 이화 복합단지가 자리매김했다. 이화 복합단지는 그 넓었던 광장을 예술성과 효율성이 뛰어나게 하기 위해 국제 초청 현상공모를 거쳐 세계적인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했다.
기존의 이화광장과 운동장을 오묘하게 배합해 가운데는 물이 흐르는 계곡을 연상케 하고 양쪽으로 생활과 학습할 수 있는 시설 공간과 교육과 연주를 위한 극장·영화관·컨벤션 홀 등이 있다. 옥상은 잔디밭 정원을 꾸며 쾌적하고 아름다움을 연출한 그린 캠퍼스가 펼쳐져 있다.
이런 현대적 건축물과 대조해 1935년에 완공된 본관, 중강당은 석조 고딕 건축물로 엄숙함을 느끼게 하며 옛날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건축물들은 문화재로 등록돼 그 향기는 영원할 것 같다.
'여의사의 힘으로 세계인의 건강을'이라는 표어를 걸고 제29차 세계여자의사 학술대회 막을 올렸다. 조직위원회는 2년 동안 이 대회를 위해 13개 분과위원회로 세분화해 가동했다.
재정분과위원장을 맡게 된 나는 세계여자의사회 조직위원회가 탄생하는 날부터 '재정'이라는 단어와 함께 '흑자'를 내야 한다는 살림살이 걱정으로 마음속은 꽉 차 있었다. 앞으로 무에서 유를 창출해야만 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을 상기시키며 120명의 조직위원과 임원들은 재정 후원을 위해 설득을 시작하고 이곳저곳에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상임이사와 이사들·재정 분과 위원·각 대학 여자 교수들 모두가 설득의 여왕이 됐다.
그 결과 자진 후원, 한국여자의사회를 무한히 아끼는 선·후배들의 협조, 각 협회 단체들의 지원, 부스를 설치해준 제약업계, 의과대학 여자 교수들과 여 전공의, 의대 여학생까지도 적극적인 참여와 봉사로 힘을 보탰다. 그야말로 이번 행사는 모든 분의 합작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과거 다른 나라에서 열렸던 학술대회와 차별화해 영원히 '코리아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더 분발한 것이다.
행사 전야제는 국회의장 공관에서 한국 전통 식사와 인간문화재 예술인들의 공연이 있었다. 원초적인 소리의 융합으로 어우러지는 사물놀이와 사뿐사뿐 버선발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순백과 한민족 특유의 춤사위를 보여준 공연으로 한아름 박수갈채를 받고 한국의 저녁을 맞게 됐다.
이번 행사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영상 메시지와 함께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박원순 서울시장·김선욱 이화여대 총장·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 등 많은 내빈이 참석해 행사를 축하했다. 세계 각 나라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여의사들은 시간이 갈수록 서로가 친숙해지고 학술 대회를 하는 동안 대형병원 투어도 했다.
MWIA 만찬을 베풀어 준 이길여 이사장님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후배 사랑의 멘토였다. 이날 13인의 남성 의사 중창단의 중후한 목소리의 배합은 한편의 멋진 음악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이번 갈라 디너쇼는 학회 때마다 하늘거리며 보여 왔던 한복의 진수를 보여주기 위해 '한복 패션쇼'를 주제로 삼았다. 어느 나라도 흉내 낼 수 없는 한복의 특징은 옷매무새마다 이야기가 있고 내용이 있다. 세계 각 나라 국기를 새겨 넣은 궁중 활옷이 등장할 때는 환호와 함께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국 드라마 <대장금> <해를 품은 달> 등 세간에 인기가 있었던 드라마에서 등장한 한복들이 모두 연출됐다. 신분에 따라 등장한 독특한 한복의 옷매무새에 세계인 뿐만아니라 관람객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더욱이 이날 출연한 늘씬하고 예쁜 모델이 모두 의대 여학생과 전공의라고 하니 한국여의사의 미래는 가히 짐작하리라.
한국 여의사들의 예술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전시회도 열렸다. 동양화·유화·사진·민화 등 총 65점이 전시됐으며 1000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세계여의사들도 함께 참여한 '예술 작품 전시회'는 또 다른 장면의 예능학술대회였다. 동양화가이자 서예가인 박영옥 선생님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모든 회원 한분 한분에게 재능봉사를 했다.
서로 간에 사인한 부채를 펼쳐 직접 난초 묵화를 그려주면서 한국의 멋을 세계로 펼쳤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들고 온 바자 물품들이 공개돼 선물들을 고르느라 북새통을 이뤘다.
학술분과에서는 밤을 지새우며 주제 선정에 공을 들인 덕에 기조연설·특강·포스트 발표·110개의 학술 주제 발표가 있었고 다양한 분야의 흥미로운 연제가 많이 발표됐다. 특히 '여의사와 정치'에 대한 주제에 많은 관심이 있었으며 국회의원인 박인숙 회장의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지만, 정치는 국민을 치료한다"는 말에 많은 회원들의 공감을 얻었다.
폐회식은 한국 여의사가 세계를 품는 순간이었다. 박경아 세계여자의사회장의 여의사의 미래에 대한 희망 메시지를 담은 취임식과 박인숙 회장과 김봉옥 조직위원장의 유창한 영어 연설로 한국여의사의 위상을 올렸다. 신현영 회원은 yMWIA 회장에 당선돼 세계 여자의사회의 미래를 일궈가게 됐다.
세계 여의사들은 한국의 문화를 즐기고 이해하며 120년 전통의 이화여자대학을 보았으리라. 그토록 엄격하고 철저히 규율을 지키며 외부인들에게 학회 장소로 개방을 하지 않았던 이화여자대학이 세계로 향해 빗장을 풀고 많은 배려와 이해로 세계 최고의 여의사 학술대회를 지원했다.
세계여의사들이 진정으로 환호하고 기뻐한 이번 학술대회는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펼친 한 편의 멋진 오케스트라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