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업성
영어 'professionalism'에 대한 번역어는 아직 통일이 되어 있지 않지만 일단 '전문직업성'으로 서술한다. 서양에서는 익숙하게 쓰이는 이 단어에 대한 번역어가 아직 통일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이 개념이 낯설다는 것을 방증한다.
전문직업성 외에도 '직업전문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직업전문성은 직업이 무엇이든 그 직업에서 갖추어야 할 전문성을, '전문직업성'은 '전문직업'이 갖춰야 할 어떤 특성을 의미한다.
의사·법조인·성직자는 예전부터 대표적인 전문직이었는데 이 전문직의 특성은 쉽게 얻을 수 없는 탁월한 업무능력을 바탕으로 본인의 이익보다는 타인과 사회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직업을 일컬었다. 그래서 "개인과 사회의 건강과 복지를 추구"한다는 내용이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타인, 혹은 사회의 '선'을 추구한다는 직업적 이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다. 이에 대해 사회는 응분의 존중과 처우로 응답을 해야 할 것인바 이를 '암묵적 계약'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의료를 다른 서비스 상품처럼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가격을 얼마나 매기든 그것은 시장의 논리에 의해 정당화될 것이며, 이런 경우 의료 접근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건강과 생명에 핵심적인 시술의 가치에는 도저히 값을 매기기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도의 훈련을 쌓고 지식을 갖춘 '전문직'에 대해 사회는 응분의 대우를 하며, 그 대가로 적절한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이다.
이러한 '암묵적' 계약에 있어 의사의 서비스는 현대 의학이 제공할 수 있는 표준적인 수준 이상이어야 하며, 이를 보장하는 것은 바로 의사 집단인데 다른 어떤 집단도 이를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가가 면허 등의 형태로 이를 보장한다 해도 실제로 이를 구현하는 것은 다른 의사들이 될 수밖에 없으며 각 의사회와 학회 등의 형태로 의사들은 이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즉 의사의 업무의 질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의사들 밖에 없으며 따라서 의사들은 전문직 표준(professional standard)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율성을 가지기 마련이다. 또한 의사 단체 역시 다른 어떤 단체나 조직도 그의 성과를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도의 자율성을 가지게 돼 있다.
이러한 자율성에는 역시 마찬가지로 높은 윤리적 책임감이 수반된다. 따라서 본 연구팀의 '전문직업성'에 포함된 내용은 의사 개인에게는 '윤리와 자율성에 기초한 진료'를, 그리고 의사 단체 등에는 '전문직 주도의 자율 규제'를 언급했다. 윤리와 자율성에 기초한 진료에 대해서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과 뜻을 다한 진료를 할 것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는 역량을 유지할 것 ▲환자 비밀보호의 원칙을 알고 이를 준수할 것 ▲진료와 관련한 증명서를 진실하게 발급할 것 등을 기술했다.
이는 최선의 역량과 윤리성에 입각한 진료의 수행으로 요약될 수 있다. 또한 '전문직 주도의 자율규제'에는 ▲관련 법규와 윤리지침을 잘 알고 준수할 것 ▲전문직 단체와 기관이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 ▲동료 의사가 전문직정신을 훼손하였을 때 적절히 대처할 것 ▲자율규제를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할 것 등을 기술했다.
또한 전문직업성의 범위 안에 '환자-의사 관계'를 설명하면서 ▲환자-의사 관계를 직무상의 관계로 한정할 것 ▲의사의 신분으로 환자와 성적 관계를 갖지 않을 것 ▲진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상충을 잘 관리할 것 ▲환자의 정치, 종교, 사회적 신념을 존중하고 환자의 신념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으며 의사의 신념 체계를 강요하지 말 것을 기술했다.
마지막으로 '전문직업성과 건강유지' 부분을 포함시켜 ▲자신의 건강을 적절히 관리할 것 ▲직무와 개인생활 간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할 것 ▲필요한 경우 동료 의사의 도움을 요청할 것 ▲자신의 진료 역량을 진솔하게 평가할 것 등을 기술했다.
환자-의사 관계는 대부분 전통적인 의료윤리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며, 건강유지에 대한 부분은 의사의 탈진(burn out)을 막고 적절한 직무 능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문직업성은 여전히 의사 자신에게도, 사회에게도 낯선 개념이다. 사회계약론과 공리주의가 일찍부터 발달한 서양과 달리,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의사에게 전통적 인술(仁術)개념에 입각한 무한한 희생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으며, 의사의 전문직역의 자율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국가의 통제에 의존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의사 자신들도 전문직으로서 요청되는 사회적 책무에 대한 개념을 숙지하기 보다는 고도의 개인 서비스로 의료를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이는 의사들에게는 물론 국민에게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물론 의료의 발전에 따라 의술이 세분화되고 일부 직무들은 서비스의 영역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의료에는 영리를 넘어서는 어떤 가치가 부여되며 이는 여전히 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 의사들에게 자율성을 허락하고 그 직무를 존중하는 것은 어떤 의사 개인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의료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임을, 그래야만 환자 개개인도 가장 양질의 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을 그 사회가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앞으로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으며 '대한민국 의사의 역할과 덕목' 연구팀에서 제안한 전문직업성에 대한 내용들도 여전히 크게 부족하고, 개선해야 할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
의사의 직역에 가장 핵심적인 이 전문직업성의 진흥을 위해서 의사들 내부에서, 또 의사와 사회 간에 보다 심층적인 대화와 논의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