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는 무거움 벗고 '그녀'의 품속으로…

견딜 수 없는 무거움 벗고 '그녀'의 품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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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1.1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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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품고 뭍으로 돌아오다'
박수현의 선박의사 체험기 ①

"의사는 진료만 해야 할까…."

어느 순간부터 환자를 대하는게 부담스러웠다. 굳이 의사가 돼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의사가 싫은 것도 아니다. 고려대 생명산업과학부를 졸업하고 경희대의학전문대학원을 거쳐 된 의사이기에 그의 인생에서 돋을새김되는 순간들이다.

그는 '처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아니 오히려 첫 경험을 즐기는 편이다. 의사가 되기 전이나 되고 나서나 여일하다. 마음을 녹여내고 몸을 움직여야 하는 봉사나, 신이 그에게 부여한 재능을 나누는 일에서나 주저함이 없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의 색다른 도전은 시작된다.

TESOL 디플로마 수료(2004) KBS iBest 캠프 교사·이벤트 기획봉사(2005) 사법시험 감독 자원봉사·세계중소기업총회 이사회 진행 통역·월드컵 시청 국민응원단 행사 진행·'미국학생을 위한 한국학워크숍' 한국여학생대표(2006) 국제병원연맹총회 프랑스대표단 수행 통역·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국가청소년위원회 민간외교활동·IWO(국제워크캠프기구) 해외봉사단 필리핀 3팀 인솔(2007) 프랑스병원협회 및 응급의료시스템·노인전문병원 탐방(2008)·네델란드 의료커뮤니케이션 교육시스템 연계 방문(2009)·미얀마 의료봉사·아이티 긴급 재난 의료 봉사·캐나다 몬트리올병원 초청 방문· 대한의사협회 사회협력위원(2010)·참진단 E 홍보국장-쪽방촌 봉사·의대생 스마일캠페인 첫 시행·존스홉킨스-연세대보건대학원 국재재난전문가 교육 수료·동티모르 의료봉사·중국 보건실태 파악 견학(2011)….

이런 연유로 이제 '서른즈음'인 그는 이미 40여개국에 발길이 닿았다.

의사 박수현. 지난해 경희의료원 인턴을 마친 그는 '휴식'을 결심했다. 그냥 쉴 성격은 못됐다. 지금은 짬짬이 미국의사면허에 도전중이다. 임상과 실기시험을 거쳤고 기초시험이 남아있다. 왜냐고 물었더니 "……". 속내야 있겠지만 뜻이 영글고 밝힐 모양이다. 내년에는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올초 이번엔 배를 탔다. 한국해양대학교 실습선 '한바다'에 올라 선박의사로서 2개월여 동안 동남아시아 일원을 주유했다.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누구를 만났고, 또 어떤 인연을 만들었을까.

그는 의사로서 세상밖으로 발걸음이 옮겨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세상과의 소통을 이야기한다. 그는 배와, 사람들과 어떤 소통을 했을까.

6회에 걸쳐 '박수현의 선박의사 체험기'를 싣는다. <편집자>

"나 배를 탈까 해"

내 말에 "대체 왜?"라는 반응과 "그럴 줄 알았어"라는 반응이 상반되게 나온다. 배 안 150명의 선의가 된다는 것. 그리고 오로지 배 안에서 먹고 자는 것을 반복해야 하는 길고 긴 여정을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쉽게 즉흥적으로 한 결정은 아니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에서 MBTI 및 여러 가지 심리 검사를 해주던 선생님이 "박수현씨는 주입식 교육과 참 맞지 않은 성향으로 용케 여기까지 왔네요"라며 웃었던 것이 생각난다. 되돌아보면 나는 참 자유롭게 살아왔다.

수십가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수십개국에 발을 딛었다. 나름 많은 이들을 만나고 많은 사회적 경험이 있다고 자부했으나, 새삼 엄격한 규율과 조직을 겪으며 나는 정제되지 않은 원석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버틸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불의한 것을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마음이 부식되기 시작했고 환자와 사람에 마음을 다해 최선을 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반복되는 공간에서 그냥 버티기만 할 수 없었다. 못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다.

"원래 의학의 과정은 버티기의 반복 아닌가요?"라는 물음에 친한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임상은 다르다. 버티는 거 외에도 하루하루 살아있게 해주는 그 무언가를 찾지 못하면, 버티는 시간 동안 비뚤어져 버리지."

나는 그저 있을 수 없었고, 버티고 싶지 않았다. 그냥 비뚤어져 버리면 안되니까. 그렇다. 나는 내 인생에 큰 양해를 구하고, 휴식을 하기로 결정한다.

의사는 사람의 몸에 감히 손을 댈 수 있게 허락받았다. 철없을 적엔 그게 신성한 특권처럼 느껴졌다. 인간이 만든 법에 의해, 내가 가진 면허증 한 장은 그래도 된다는 엄청난 권리를 가진 것만 같이 보였지만 그건 너무나 무거운 손을 갖게 되는 것이다.

▲ 배의 첫 인상은 품이 그리운 옛 엄마보다는 세련된 현대적 엄마 같은 인상이다. 그래도 역시 엄마는 엄마인지 나를 맡겨도 좋겠다는 마음을 들게 했다.

심지어 같은 처치를 시행해도 다르게 결과가 나오는 각기 다른 케이스들을 숱하게 봤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았다. 나는 무거워서 그리고 그 무게감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휴식, 바쁘던 세상이 갑자기 느려지기 시작한다. 느린 시간은 편안함보단 묘한 패배의식으로 뒤덮여 간다.

세상이 너무 쓰다. 술로 헹궈도 그 맛이 너무 깊이 남아 아린 느낌. 그러다 '세 살만 어렸어도…' 되뇌인다. 늘 딜레마에 대한 결론은 가지지 못한 거에 대한 미련이다. 결정에 가장 쓸데없는 요소다.

그렇게 열정 있고 가슴까지 태울 수 있던 나는 어디 갔나 한참을 찾다가 떠남을 결정한다. 단편적으로 병원에서 대진을 하며 백 여명이 넘는 환자를 봐도 가슴은 더욱 휑하게 뻥 뚫렸다. 마음을 찾기 위해선 긴 여정 팀원의 상태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챙기는 팀 닥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간절하게….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아이티 대지진 파견의 어느 날 밤 직접 대지진을 겪었다. 땅의 흔들림, 그리고 이어져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사람들의 울음 소리, 그리고 설교소리.

이후 둔했던 내가 진동에 민감해졌다. 거기에 뱃멀미는 물론 비행기 멀미까지 있어 모든 교통수단은 내게 수면을 취하는 장소였다. 혹 오히려 내가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란 불안감. 이렇게 최종결정까지 꽤 망설였다.

나는 아직 젊다. 그때의 그 열정이 그립다. 그리고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주변의 반대에도 마음을 바람에 실어 바다로 가보기로 한다.

출항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결정된 터라 약품 리스트와 진료실 사정을 알아야 하기에 급히 부산으로 출발했다. 여러 차례 통화했지만,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든 기구들과 약품을 확인해주기는 불가능 했다. 빠를수록 필요한 물품들을 주문할 수 있으니, 마음이 급할 수 밖에….

처음 만난 그녀(배)는 그저 황홀했다. 라틴어·스페인어·프랑스어 같이 여성형·남성형을 구분 짓는 언어에서 '배'는 항상 여성형이다. 그만큼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품어주고 감싸 안아주는 역할의 의미를 내포한다.

견딜 수 없는 무거움 벗고 '그녀'의 품속으로…

배의 첫인상은 품이 그리운 옛 엄마보다는 세련된 현대적 엄마 같은 인상이다. 그래도 역시 엄마는 엄마인지 나를 맡겨도 좋겠다는 마음을 들게 해준다. 외관도 예뻤지만 좁다란 계단을 올라서자 문 틈새로 보이는 대리석 안내데스크.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선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이 든다. 겉으로 보기보다는 너무나 오밀조밀하게 구성돼 있다. 나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만 같다.

먼저 선장님을 뵙는다. 영화나 만화에서 보고 동경했던 모습 그대로이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선장님은 보자마자 내 멀미 걱정을 한다. 전에 있던 의사 중 몇 분은 멀미 때문에 종일 누워 있느라 방 밖으로 못 나왔다면서 겁 아닌 겁을 준다.

그래도 꿋꿋하게 포커페이스를 지키며 선장님과 정박지에 있는 풍토병 그리고 중국에 유행중인 조류독감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했다. 이미 감염관리본부 홈페이지에서 갈 곳에 대한 전염병 및 풍토병 조사를 하긴 했지만, 수시로 바뀌고 있는 현황 때문에 중간중간 알아봐야 할 것들이 많다. 선장실에서 나오니 3등 항해사가 기다리고 있다.

배에서 의료관리자는 3등 항해사로 의사가 탑승하지 않았을 때 대신 응급처치를 수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간호사나 의료보조인력이 없는 배에서 앞으로 나와 방향 및 필요한 의약품에 대해 의논하고 보조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의사를 최종으로 책임지고 담당하는 사람은 배의 살림을 도맡는 제 1항해사라고 한다. 제 3항해사는 배에 무지한 내게 배의 이곳 저곳을 보여주고, 진료실과 의사 방을 체크할 수 있게 도와줬다. 항해가 얼마 남지 않은 터라 다들 분주하다.

나는 마치 하얀 토끼를 따라다니는 앨리스 처럼 정신 없이 배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빠르게 의료비품을 점검했다. 그 후엔 필요한 약물을 추가 주문하고, 장비들을 작동시켜보고 빠짐없이 챙겨봤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제 1항해사가 나와서 내게 기본적인 오리엔테이션을 해준다. 아직 나에겐 익숙하지 않은 직책 명.

간단히 정리를 하자면 일반적으로 선박은 갑판부·기관부·통사부 3가지 부서로 나뉜다. 선장은 배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맡는다. 갑판부는 선장을 위로 두고 그 밑에 항해사라고 부르는 갑판사관들이 있다. 그 밑에는 역시 갑판부원이라 하여 갑판장과 갑판수들이 있다.

기관부 전체를 담당하는 이가 기관장. 기관부에는 기관사관들이 있고 그 밑에는 조기장을 필두로 기관부원들이 있다. 통사부는 통신장을 부서장으로 해 사주장과 사주부원으로 구성되고 주로 통신·수속과 맛있는 식사를 책임진다.

처음엔 이 구조가 얼마나 생소하고 헷갈리던지, 이 호칭들을 외우는데 고생했다. 여기서 나의 호칭은 닥터 선생님의 준말 '닥쌤'이다.

마지막 오리엔테이션이 끝날 때 혹시 면세품 중에 필요한 게 있냐고 묻는다.

"글쎄요. 없는데…아, 술?"이라고 하자, 어떤 술인지 묻는다. 맥주를 좋아해서 가끔 마시려고 한다고 하자, 웃으며 선생님 마실 술은 충분히 있단다(과연 충분했을까?). 그러면서 1등항해사의 직감상 이번 의사 선생님은 배가 체질 일 거 같다고 한다.

정박 중임에도 미묘하게 흔들리는 배 안에서 역시 멀미가 걱정되었지만 혹 출항할 때 두고 갈까 티도 못 내고 배와의 첫 만남을 마친다. 까짓 거 이미 결정됐고, 번복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갈치 시장에서 회 한 점과 부산 소주인 '씨원'에 걱정을 모두 날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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