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채 회장님!
아직도 그 능숙하고 매사에 철두철미하신 솜씨를 보여주시던 선배님이신데 어떻게 그렇게 쉽사리 우리 곁을 훌쩍 떠나셨습니까.
얼마 전 호흡기 질환으로 영남대학교병원에 입원하셨다가 포항성모병원으로 이송됐다고 하여 곧 회복해 퇴원하시기를 바랐는데 폐렴이 악화하여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곧 설날이 다가오는데 선배님의 비보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하지만 이렇게 쉽사리 우리 곁을 떠나실 줄 몰랐습니다.
선배님은 1931년 1월,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동리에서 출생하셨으며, 향년 83세이십니다. 6.25동란 중 대구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1959년 경북의대를 졸업하셨으며, 모교에서 산부인과 전문의와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시고 의과대학 외래교수를 역임하셨습니다.
그 후 대구적십자병원과 부산종합병원에서 산부인과 과장으로 재직하시다가 1976년경 포항으로 오시어 '이병채산부인과의원'을 개원하여 많은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포항에 개업하신 후 각종 사회단체에 가입하였으며, 의사회 임원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1982년도 포항시의사회장을 맡을 당시 적출물 처리는 상이군경협회에 위탁 처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위탁 처리하던 상이군경협회 직원이 적출물을 불법처리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검찰에 고발되어 당시 회장인 이병채 회장님이 검찰에 조사를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적출물을 처리하는 직원이 소각하지 않고 소각비를 아끼려고 불법매립한 것이 발각되어 지방 뉴스에 보도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출물을 직접 처리하기 위하여 의사회에서 직영 처리하기로 결정하고 그 당시 부회장이던 저는 이병채 회장님과 적출물 처리조례 및 수가 등을 결정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여 수년간 원만히 처리하였습니다.
당시 전국에서 의사회가 직접 적출물처리회사를 경영하는 유일한 의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회원 수가 많아지고 적출물처리 범위가 커짐에 따라 지금과 같은 회사로 위탁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적출물 처리규정을 정하는데 얼마나 세심하고 조리 있게 규정집을 만드셨는지 모두 놀랐습니다.
1991년 3월, 경상북도의사회장 선거에 대의원 투표로 두 분이 출마하여 치열한 경선으로 인해 경북 전역의 대의원을 찾아다니시며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여 이병채 회장님이 무난히 당선되었으며, 제35대 경북의사회장으로 열심히 노렸으며, 중앙에서도 대한의사협회 감사로서 3년 동안 예리한 통찰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94년 4월, 대한의사협회 대의원회 부의장으로 활동하시면서 법정관 분과위원장으로 원만한 회의진행과 명사회로서 회의를 이끌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영덕군 영해면 창수천변에서 영덕 김찬우 국회의원과 이시형·이경수·김병만·이병채 선배님들과 같이 달빛이 휘황찬란한 저녁 시냇가에 앉아 천렵으로 잡은 고기를 구워놓고 낭만을 즐길 때도 있었으며, 청송 신선계곡에서 맑은 물에 수영을 즐기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천렵으로 잡은 고기를 요리할 때는 선배님의 특이한 요리 솜씨로 튀김과 매운탕, 소금구이 요리 등은 지금 생각만해도 군침이 돌듯합니다. 오일회에 들어오셔서 일본 교토 등으로 여행도 다니시고 괌까지도 다녀왔습니다. 국내 여러 곳으로 다녔으며 김찬우 의원과도 같이 부곡호텔에서 노래방을 독점하여 멋진 노래도 하셨지요. 곡목은 항상 '으악새 슬피우는'으로 목청을 울렸지요. 이때가 부산도시고속도로가 처음으로 개통되어 여러개의 터널을 지났던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선배님은 우리사회에 큰 업적을 남기시고 우리들 곁을 떠나셨지만 우리들은 그 깊은 은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유족으로 유향자 엘리자벳 사모님과 슬하에 SK주식회사 부장인 아들 종섭, 딸 혜승 글라라와 손자 3명을 두셨으며, 모두 사회에서 선두주자로 활동하고 있고 건강하고 회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니 그동안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셔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편히 쉴 틈도 없이 일해 오셨습니다. 밤낮을 잊으시면서 활동하셨던 모든일은 접어두고 편안히 영생하소서.
2014년 1월 22일 신은식 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