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스위트 지음/미래엔 펴냄/1만 6000원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지역 공공병원 라구나 혼다. 이곳은 17세기 아픈 이들을 대가 없이 돌보던 '파리시립병원(일명 신의 호텔)'의 후손격 병원으로 미국 최후의 빈민구호소다. 노숙자·극빈자 등 사회소외계층을 비롯해 알코올의존증환자, 치매·뇌졸중을 앓는 노인 등 까다로운 만성질환자들이 모인다. MRI 하나 없는 노후한 시설에 매년 예산 부족과 씨름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그들은 서서히 회복된다. 의료진의 만족도와 근속률이 다른 어느 병원보다 높다. 라구나 혼다가 의사와 환자들에게 '신의 호텔'로 기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의대 임상부교수이자 역사학자인 빅토리아 스위트가 20년간 라구나 혼다에서 헌신한 기록인 <신의 호텔>이 출간됐다.
두 달 만 머무르기로 하고 첫 발을 내디딘 저자가 라구나 혼다에서 20여년을 보낸 이유는 인간중심적인 분위기, 충분한 시간을 들여 환자의 몸과 마음과 환경까지 돌보는 '느린의학'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이 책은 뇌졸중으로 모든 기억을 잃고 홀로 남겨진 교수, 정치문제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이국땅에서 암투병을 하는 경제학자, 자신을 자판기로 생각하고 동전을 집어 삼키다 실려온 정신질환 노숙자 등 다양한 인생사연과 병력을 지닌 환자들을 진료하며 겪은 경이로움을 독자에게 전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의학과 보건의료체계가 간과하고 있는 의학과 병원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늘 고민하던 의학도로서, 의학의 역사에 깊이 있게 다가서며 그 안에 담긴 진실을 풀어 놓는다.
그러나 현실은 선한 의지만으로는 병원을 지키기 어렵게 한다. 라구나 혼다에도 자본과 경제효율의 압력이 들이닥치고, 정책입안자·경제학자·의료컨설팅회사의 관점으로 대대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병원은 시간당 생산효율 준수, 과학적 경영관리와 첨단시설 설립 등으로 21세기 보건의료기준을 채워간다. 반면 이런 변화를 거치는 동안 의료진은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환자들은 더 빈번히 사고에 노출되고 치유는 더뎌진다.
이 책에는 병원이 변화되고 진통을 겪는 과정과, 이에 맞서 병원의 인간 중심적인 환경과 정신을 지켜내려는 의료진들의 분투를 생생하게 옮겨 놓는다. 이를 통해 의사·간호사·병원행정관리자·정책입안자뿐만 아니라, 언제든 환자 혹은 그 가족이 될 수도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의학과 의료제도의 문제에서 가장 중심에 둬야 할 것은 결구 '사람'이라는 오래된 지혜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인간적인 분위기' '풍요로운 시간' '지극히 사소한 것에 대한 배려'가 전해주는 가치를 되새겨 준다.
내과전문의이자 역사학 박사학위 소지자인 저자는 현대의학으로는 풀리지 않는 의학적 통찰이나 지혜를 찾아가는 역정도 소개한다. 특히 12세기 독일의 의사수녀인 힐데가르트의 '초록의 생명력'에 천착하며, 단절된 과거 의학을 재조명한다. 힐데카르트 의학의 핵심은 환자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에 맞은 치료법을 동원하며, 환자의 '초록의 생명력'이 활성화되도록 돕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흥미로운 임상사례와 인간애가 가득한 병동의 일화, 의학과 의료의 본질을 찾아가는 역사 연구, 보건의료계 최일선의 문제들이 이 책 속 유려한 문체를 통해 의료의 진정한 가치와 방향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이 책을 번역한 김성훈은 치과의사 출신 전문번역가로 출판번역 및 기획그룹 '바른번역'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그동안 <우리 아이를 위한 내몸 사용설명서> <의사들에게는 비밀이 있다> <메이요클리닉 이야기> <뇌의 미래> <위대한 수학> <흥미로운 심해 탐사여행> <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 <글자로만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로 창조하는 사람>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1800-8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