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진 변호사(오두진법률사무소)
지난 6월 26일 대법원은 한 형사건에 대해 사건이 상고심에 접수된 지 4년 반 만에 판결을 선고했고, 이는 곧 큰 뉴스거리가 됐다. 종교적 이유로 무수혈을 요청한 환자가 과다출혈로 사망한 사건에서 의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확정 판결이다.
이 재판은 일반인들에게는 아마도 특정 종교인들에 대해 잠시 한담을 나누는 수준의 주제였겠지만, 의료인들에게는 앞으로 환자의 선택에 대해 자신들이 고려해야 할 원칙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또한 법조인들에게는 일명 보라매 병원 사건에서 세브란스병원 김할머니 사건을 거쳐 마침내 한국도 영미와 유럽에서 이미 확립된 환자의 자기결정권 존중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환자와는 종교가 다른 가족이 문제를 삼아 기소 됐던 이 사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자기결정권이 생명과 대등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의사가 어느 하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행위를 하더라도 이를 처벌할 수 없다는 법리를 최초로 선언한 판결"이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여기서 언급된 "최초로 선언된 법리"란 무엇이고, 이것이 일선 현장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인식의 증가이다. 보라매병원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대법원은 의사의 생명 보호 의무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다가 지난 2009년에는 비록 민사 사건이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힌 환자의 의사를 존중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응급 상황은 아니지만 사망이 바로 예견되는 상태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전원합의체 판결이었다. 그리고 응급 상황이 관련된 형사 사건에서 최초로 유사한 법리를 선언한 것이 이번 판결이다.
재판부는 "자기결정권 및 신뢰관계가 진료 계약의 기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환자의 동의가 헌법 제10조에서 규정한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에 의하여 보호되는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결정권의 행사가 생명과 대등한 가치가 있는 헌법적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이러한 자기결정권에 의한 환자의 의사도 존중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또한 "환자의 생명과 자기결정권을 비교형량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의사가 직업적 양심에 따라 어느 하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행위했다면, 이러한 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는 법리를 선언하면서, 이 사건의 경우 그렇게 환자의 의사를 존중한 의사가 "진료상의 주의의무를 다하지 아니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은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처럼 "확고한 종교적 또는 양심적 신념에 기초한" 특별한 사정을 전제로 한다는 한계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자기결정권의 존중을 생명보호의 가치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연관되는 것으로 본 선진 판례의 태도와 맥이 닿는다.
우리 대법원은 이미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생명권이 가장 중요한 기본권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 역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보호돼야 할 것"이라고 했고, 유럽인권재판소는 여호와의 증인의 수혈 거부에 대해 논하면서 "선택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은 그 자체가 생명권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요소"라고 판결했다.
둘째, 대법원은 무수혈 치료를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대체의료 방법'으로 보았다. 재판부는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수술을 하는 경우에도 수혈 대체의료 방법과 함께 그 당시의 의료 수준에 따라 출혈로 인한 위험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사전준비나 시술방법을 시행함으로써 위험 발생의 가능성을 줄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는 주의의무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수혈을 거부하는 행위를 자살과 대등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는 사실과 현재 무수혈 치료가 환자의 결정을 존중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는 수혈 관련 문제를 극복할 유용한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판단은 이번 판결에 숨겨진 또 하나의 진보적 요소라고 보인다.
이는 아마도 원심 법원이 사실인정 과정에서 무수혈 치료 현황을 자세히 검토한 결과 "국내의 많은 병원들이 '무수혈 센터'와 무수혈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무수혈 치료를 하고 있다"고 판단한 점에 크게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대법원의 태도는 유럽인권재판소가 수혈 거부에 대해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와 같이 치료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이 회복되기를 희망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의료 방법을 두고 선택권을 행사하는 것은 사망시기를 단축시키기 위해 치료를 중단하는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라고 평가한 것과도 유사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법원의 판단은 수혈거부와 같이 환자의 결정과 의료진의 생각이 서로 다를 때 이를 단순히 대립하는 문제로 보던 시각에서 보다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돕는다고 생각한다.
환자와 의사는 대법원이 판시한 것처럼 '위임과 신뢰'를 기초로 한 관계이고, 무엇보다 양측은 치료라는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응급상황에서도 환자의 결정을 존중한 의료행위의 정당성을 법적으로 확인한 이번 판결이 향후 의료 현장에서 의료진이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분명하게 표현된 환자의 의사에 따라 치료를 시작하거나 계속함으로써 오히려 생명 보존의 적기를 놓치지 않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