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질병이라는 '수퍼갑'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2

청진기 질병이라는 '수퍼갑'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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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2.0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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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희 (인천 서구·연세엄마손의원 원장·매거진 <반창고> 발행인)

▲ 전진희 (인천 서구·연세엄마손의원 원장·매거진 <반창고> 발행인)

"잠이 오지 않습니다."

50대이지만 미모와 고급스러운 옷차림으로 내원한 그녀의 얼굴은 수심이 어두웠다. 눈 밑은 거무스레 했고 한껏 화장으로 꾸미려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푸석하고 눈빛은 멍했다. 그녀는 서너 달 전부터 나의 병원에서 고혈압을 관리하던 환자다.

여느 때처럼 혈압약 처방을 위해 청진을 하고 간단히 문진을 시작하려고 하던 나는 그녀의 어두운 낯빛에 걱정스러움이 앞섰다. "어머님, 여느 때랑 다르신 것 같아요. 혹시 요즘 달라지신 게 있으신가요?" 조심스레 안부를 묻는 나에게 그녀는 잠이 오지 않는다며 불쑥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요즘 밤에 뜬눈으로 두서너 시간을 침대에서 뒤척이고, 간신히 잠이 든 것 같아서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주변의 소리와 움직임을 전부 느껴 깊이 잠을 못 이룬다고 했다.

"낮에는 어떠세요? 낮잠은 좀 주무시나요?" 라는 질문에 환자는 낮에는 멍하고 식사도 잘 안 되고 답답하기만 하단다. 환자의 호소에 의사로서 답을 주기보다는 그녀에게 위로가 필요하단 생각에 손을 지긋이 잡아줬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밝은 얼굴은 가진 환자였는데 무엇이 그녀를 아프게 했는지 궁금했다.

나는 그녀의 '불면' 이라는 질병을 대하기 위해 그녀와 협력을 꾀하기로 했다. 물론 '수면제' 몇 알이 그녀의 잠을 다시 회복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은 명백했다. 그러나 다른 답을 찾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자, 그녀와 나는 '불면'과 싸우기 위한 연합군이 됐다.

질문의 질문은 꼬리를 물었고 그녀와 나는 긴 대화를 이어갔다.

간단한 검사를 통해 심장과 신장, 혹은 갑상선 질환을 배제하며 '불면'과 대결을 시작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불면에 자신이 심각한 질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하는 2차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환자는 나와 함께 예상 가능한 불면의 원인을 찾아가며 불안감을 조금씩 덜고 있었다.

며칠 동안 수시로 내원해 수면시간과 질을 따져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달리 환해진 얼굴로 그녀는 병원에 내원했다.

"선생님, 어제는 잘 잤어요. 제 아들이 얼마 전 군대에 갔어요. 저는 나름 담담히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밤마다 군대에 있는 아들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었나 봐요. 아들이 배치를 받고 나니 이제야 잠을 자는 거 있죠. 선생님과 며칠 동안 진료실에서 대화하면서 조금씩 마음도 편해지며 좋아진 거 같아요."

그녀와 나는 손을 잡고 한참을 아들 얘기를 나누며 '불면'의 진료를 마쳤다. 이후 그녀와 아들의 결혼과 첫 손주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누는 사이가 됐다. 그녀는 여전히 나의 병원에서 혈압을 체크하고 건강을 관리한다.

나는 불면이란 질병의 원인을 몸의 이상과 함께 환자가 스스로 '원인'을 찾도록 도왔다. 그녀는 나를 믿고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답을 얻었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수면제 먹다가 며칠 지나면 나았겠네."

하지만 그녀가 수면제를 먹고 며칠은 잠이 들었다 해도 아들에 대한 걱정까지 쉽게 내려놓고 불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을까? 환자는 나와 진료실에서 대화를 나누며 아들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는 부모가 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수면을 되찾았다. 아마도 수면제 처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잠을 잘 수는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불면의 원인을 해결하지 못했다면 수면제 복용은 지속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와 연합군으로 질병과 싸우기 위해 함께 노력했을 뿐이다. 그녀의 불면과 난 직접 싸우지 않았다. 어떤 질병도 내가 직접 그녀 대신 싸울 수 없다. 난 단지 '질병'에 대한 예상 가능한 원인을 찾아 대응할 방법을 찾아보며 그녀에게 스스로 싸울 힘을 준 것이다.

환자와 의사가 연합을 이룬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이 '질병'의 예상 가능한 원인을 찾아내며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원인을 배제하고 더불어 의외의 반응으로 전혀 다른 승리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과정이 진단과 치료이다.

질병에 익숙한 의사와 낯선 질병에 걸린 환자의 만남은 유쾌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남의 시작이 이렇다 해도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과 결과에 유쾌함을 더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나와 그녀는 며칠간의 대화로 서로에 대한 신뢰를 만들어 가고 서로가 인간적으로 성숙하며, 서로의 삶을 의학이라는 과학 안에서 서로 나누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질병이라는 슈퍼갑을 대하는 현명한 연합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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