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한국 의료제도 개선 지름길 '신뢰 회복'

신년특집 한국 의료제도 개선 지름길 '신뢰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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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1.0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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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국의료 지속 가능한가? ⑤ 한국의료체계 살리기 응급처방

▲ 이진석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조정실장 서울의대 교수·의료관리학)

한국 의료의 지속 가능성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걱정의 이유는 간단히 정리하기에 벅찰 정도로 많다.

지속해서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고 있음에도 여전한 국민의 의료 불안, 저수가 정책으로 인한 의료의 왜곡, 지속적인 의료비 지출 증가, 저성장·저출산·고령화로 인한 건강보험재정의 불안정성, 1차 의료의 양적·질적 위축으로 상징되는 의료전달체계의 붕괴,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에서 드러난 부실한 국가방역체계 등 모두 간단치 않은 문제들이다.

번번이 어긋난 옥죄기식 과도한 예측

한국 의료의 지속 가능성과 관련해서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는 위기 요인은 고령화로 인한 의료비 지출 증가이다. 그러나 그간 고령화가 한국 의료에 미칠 영향은 지나치게 과장됐다.

일례로 2011년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인구 고령화 때문에 건강보험 적자가 2015년 5조 원, 2020년 16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발표했다. 같은 해 국민건강보험공단 산하 건강보장선진화위원회에서도 인구 고령화로 인한 건강보험 적자가 2015년 6조 원, 2020년 17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2015년 건강보험 재정은 17조원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정부의 예측은 번번이 현실에서 크게 벗어났다. 2000년 이후 가파르게 증가하던 노인 1인당 의료비 지출은 2010년을 경과하면서 증가율이 감소하는 추세로 접어들었다.

노인 1인당 의료비 배수(노인 1인당 연간 의료비 지출액/비노인 1인당 연간 의료비 지출액)도 2001년 2.8배 수준에서 2008년 4.1배로 가파르게 증가했지만, 그 이후 4.1∼4.2배 수준으로 정체하고 있다. 미국·일본·영국·호주·캐나다 등 대다수 국가는 이미 1990년대부터 노인 1인당 의료비 배수가 4∼5배 수준에 달했고, 이 같은 수치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저명한 국제학술지인 <란셋>은 인구 고령화가 의료재정을 미치는 영향을 특별 주제로 연이어 다루었는데, 여기에도 고령화 자체로 인한 의료비 급증의 근거는 불분명하다는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고령화는 우리 사회가 경계해야 할 위기 요인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고령화로 인한 한국 의료의 파국 시나리오는 엄포에 가깝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를 경험한 국가들도 극복했거나 극복 중인 문제이고,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 의료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지난 40여 년간 지속한 '저부담-저보장-저수가 구조'와 날로 심각해지는 '의료전달체계의 붕괴'다. 이 문제들을 잘 해결한다면, 저성장·저출산·고령화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들 위기 요인의 부정적 영향은 극대화될 것이다.

저부담·저보장·저수가 불만 증폭

현행의 '저부담-저보장-저수가 구조'는 국민과 의료계의 부담과 불만을 증폭시키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 부담하는 건강보험료율은 6% 남짓인데, 이는 평균 10%를 웃도는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낮은 건강보험 보장성으로 인한 과중한 본인 부담과 건강보험료보다 세 배나 더 많은 민간의료보험료 부담을 고려하면, 국민의 총 부담은 절대 적지 않다.

원가 보전을 못 하는 낮은 건강보험수가는 의료를 왜곡하고, 의사의 전문가적 자긍심을 훼손하고 있다. 의사와 의료기관은 박리다매 식의 진료와 비급여 진료를 통해 저수가로 인한 재정 손실을 보전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려 있다. 교과서적인 진료를 하면 패자가 되는 구조의 일차적 피해자는 의사와 의료기관이지만, 궁극적인 피해자는 국민과 환자이다.

'저부담-저보장-저수가 구조'의 문제점이 지적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쥔 정부는 미래 세대에게 폭탄 떠넘기기를 하고 있다.

이 와중에 문제 해결의 비용은 커지고, 그만큼 문제 해결의 가능성은 줄어들고 있다. 17조원이라는 누적 적립금이 쌓인 지금이 문제 해결의 적기이다. 앞으로 이런 호기를 다시 얻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건보 누적 적립금 17조 난제 해결 적기

'의료전달체계의 붕괴와 1차의료의 약화'는 우리나라 의료의 골간을 병들게 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전체 건강보험 급여비에서 동네의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반 토막이 났다.

환자를 놓고 동네의원과 병원이 무한경쟁을 하고, 한번 대형병원으로 간 경증환자들은 동네의원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의료전달체계 붕괴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대형병원만 탓할 수도 없다. 이들도 박리다매 식의 진료를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의료기관들이 종적·횡적으로 서로 연계하고 협력할 때, 국민과 환자를 위한 가장 바람직한 의료를 제공할 수 있다. 의료전달체계 붕괴가 메르스 사태 확산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면서, 최근 이에 대한 논의가 일부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는 여전히 이르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의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가 돈이 없어서이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국민의료비 비중은 OECD 평균에 한참 미달한다.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를 감안하면, 아직도 상당한 정도의 추가적인 재정 부담은 충분히 가능하다.

2014년 기준으로 가구당 월평균 건강보험료는 7만 9000원(지역)∼9만 7000원(직장) 수준이다. 만약, 지금보다 1.5배 정도의 건강보험료를 부담한다면, 2014년 기준으로 약 24조 원의 추가적인 건강보험재정을 마련할 수 있다. 위에서 제시한 문제들을 일시에 해결하고도 남을 액수다.

상호이해·신뢰 부재 근원적 한계 절감

국민과 의료계를 모두 고통스럽게 만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상호 간의 이해와 신뢰 부재 때문이다. 몇 년 전에 건강보험료를 지금보다 더 내서 보장성도 강화하고, 저수가 문제도 해결하자는 시민운동을 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일반 시민의 가장 흔한 반응은 "민간의료보험료를 한 달에 몇십 만 원 내고 있는데, 건강보험료를 몇만 원 더 내서 의료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더 낼 수 있다. 그런데 의사들을 못 믿겠다. 결국, 보험료를 더 내서 의사만 배를 불려주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런 불신은 의료계도 마찬가지였다. "보험료를 더 내고 적정수가를 보장한다는 말을 못 믿겠다. 기존의 저수가는 그대로 둔 채, 비급여만 가격을 후려쳐서 급여화하면 의사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게 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일반적이었다.

의료전달체계 확립과 관련해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시민단체 활동가 중 어떤 이는 1차 의료 강화에 동의한다면서, "대형병원의 몫을 빼앗아 동네의원에 나눠주자"고 주장한다. 대형병원의 팽창이 1차 의료의 위축을 초래한 것은 맞지만,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의사와 의료기관의 행태가 제도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이들의 탐욕 때문으로 이해해서는 올바른 해법이 나올 수가 없다. 의료전달체계 확립의 핵심 수단인 진료의뢰수가 신설에 대해서도 시민사회는 동네의원의 수입을 올려주는 방편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

포괄적 만성질환 관리사업의 확대가 지지부진한 이유도 신뢰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만성질환 관리사업의 중요성은 의료계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주치의제도나 등록제로 이어지고, 의료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경로로 작용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우려를 하고 있다.

현 제도 유지 국민·의료계 실익 없어

상호 간의 이해와 신뢰 부재의 결과는 현행 체제의 유지이다. 현행 체제가 유지된다면, 한국 의료의 지속 가능성도 담보할 수 없게 되고, 국민과 의료계 모두가 패자가 된다. 국민과 의료계가 함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호 간의 이해와 신뢰를 형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의료계는 국민이 겪는 의료 불안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국민의 편에 서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해 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민은 저수가와 의료전달체계 붕괴로 인한 의료계의 고통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 주어야 한다.

색안경을 쓰고 의료계를 비방하면, 일시적으로 속이 후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한국 의료의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의사가 양심적으로 편안하게 진료할 수 있는 의료제도는 국민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의료제도이다.

상호 간의 이해와 신뢰 부재는 오랜 역사적 경험과 제도적 결함의 결과이다. 따라서 이를 회복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만큼,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상호 간의 이해와 신뢰를 쌓기 위한 작은 노력부터 해야 한다.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하나둘씩 쌓일 때, 한국 의료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의 싹이 움틀 것이다. 올해가 국민과 의료계가 함께 승리할 수 있는 상호 이해와 신뢰 구축의 원년이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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